밥상의 T.P.O

by 늘봄유정

집밥에 있어 나만의 루브릭이 있다.


아침식사는 차리는 사람에겐 쉽고 먹는 사람에겐 간단하게.

모두가 바쁜 아침이다. 남편은 토마토와 블루베리를 함께 갈아 넣은 주스 한잔에 각종 영양제를 챙겨 먹고 출근한다. 큰 아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아침식사를 거르기 시작했다. 나름의 간헐적 단식을 하는 모양. 반드시 밥을 먹어야 하는 작은 아이의 아침도 간단하다. 달걀 간장밥에 김치, 토스트에 달걀프라이와 베이컨, 사골국에 밥, 전복죽 등. 부담 없는 일품요리가 주를 이룬다.


점심식사는 말 그대로 점찍는 듯한 일품요리.

사실, 옛날 옛적에(코로나 이전... 기억도 희미한...) 점심에 나 혼자 집을 지키던 시절에는 대충 때우던 한 끼였다. 누구를 위해 점심을 차려야 하는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온라인 클래스로 집에 있는 아이에게 점심은 급식 대신이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마음에 점을 찍듯 조금만 먹는 게 점심이라지만 사람마다 찍을 점의 크기는 다르니 한창때인 작은 아이의 점심 양은 적지 않다. 먹지도 않는 반찬을 여러 개 내놓기보다는 덮밥이나 떡국 같은 든든한 일품요리를 준비한다.


집밥의 백미는 저녁식사가 아닐까. 저녁은 눈도 코도 입도 마음도 즐겁게.

마른반찬, 김, 나물, 김치 등 대여섯 가지 반찬들이 메인 요리를 둘러싸고 그 밥상을 가족들이 둘러앉는 풍경을 가정하고 준비한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불고기, 제육볶음, 그도 아니면 데친 오징어나 생선조림이라도 가운데 떡하니 있는 밥상이 저녁 메뉴로 어울린다. 식구들마다 귀가시간이 다르더라도 주부인 내가 가장 공들이는 끼니다.


이런 내가... 그걸 아는 사람이...

남편에게 저녁 식사로 'breakfast'를 줬다. 소심한 복수나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외식업에 종사하는 남편은 3시쯤 점심식사를 한다. 점심장사를 끝낸 종업원들과 함께 식사하다 보니 그렇게 늦은 점심을 먹게 된 것이다. 퇴근 후 집에 온 시간은 7시 30분. 시장기는 없지만 뭔가를 먹기는 먹어야겠다며 부엌을 서성였다. 사실, 이 시간에 남편이 집에 귀가한 게 오래간만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코로나 이전엔 술, 친구들과 함께 했을 시간이었고 올 한 해는 자격증 공부로 끼니도 거르며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 귀가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속이 그득해서 밥은 좀 그런데?"라고 말하는 남편과 무엇이든 저녁을 차렸다고 이름을 짓고 싶었던 나는 같이 부엌을 서성였다. 그러다가 며칠 전 남편이 잘 구운 토스트가 먹고 싶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식빵 먹을래?"라는 나의 말에 남편은 동의했다. '식빵'이라고 말했지만 토스트 두쪽과 달걀프라이, 베이컨, 브리치즈, 크림치즈, 딸기잼까지 나름 풍성하게 차렸다. 깜깜한 밤에, 뭔가 어색했지만 뭐...

남편은 그걸 몽땅 들고 거실 작은 탁자로 옮겼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빵에 치즈를 얹어 한입, 달걀과 베이컨을 얹어 한입 먹었다. 음료도 마다했다. 국 없이는 밥 못 먹는 사람이 뻑뻑한 토스트를 그냥 먹다니... 저녁식사로 토스트라니 참 거시기했지만 뭐... 본인도 원한 거니까.


남편의 식사가 끝날 무렵 귀가한 아이들은 배고프다며 고기고기 노래를 불렀다. 남편은 냉동실에 있는 대패삼겹살을 꺼내 굽기 시작했다. 뜨끈한 밥에 고기 얹어 한입, 쌈장 찍은 고기를 김치에 싸서 한입 먹는 아이들을 보니 오늘 저녁은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표정도 오묘해 보였다. 분명히 저녁이라는 걸 먹었으니 배는 그득하게 부를 텐데, 아이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을 실감할 텐데, 저녁 같지 않은 저녁을 먹었다는 저 표정은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때와 장소에 맞는 옷차림을 뜻하는 패션용어인 TPO가 집밥에도 있다면 오늘 남편의 저녁은 time, place, occasion 중 어느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점심을 늦게 먹은 남편이 조금만 기다렸더라면 아이들과 기름진 고기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거실 바닥이 아니라 식탁에서 제대로 앉아 먹었더라면 조금은 덜 궁상맞아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남편이 먹은 메뉴 구성이 토스트만 아니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저녁 식사라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구성이었다. 정작 먹은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나 혼자 찜찜한지도 모르겠다.


'무릇,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이라 함은 이렇고 저래야 한다.'라는 강박증에 시달렸던 게 아닐까. 삶이라는 게 계획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니요 가끔은 타인에게 피해만 가지 않는다면 멋대로 살면 좀 어때서? 삶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저 한 끼다. "밥 대신 빵 먹는다고 뭐! 왜! 뭐!!!"라고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쏘아붙였다.


반짝반짝 작은 별~
달팽이집을 집시다~
에이 비 씨 디 이 에프 지~
baa baa black sheep have you any wool~

동요와 알파벳송으로 친숙한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 다르게 연주되는 12개의 변주.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경쾌하게, 진지한 듯하다가 방정맞기도 하다. 같은 곡 다른 느낌의 연주를 자꾸 듣다 보면 유연한 사람이 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내가 만든 틀에 갇혀 나를 들들 볶고 주변 사람도 힘들게 했는지 모르겠다. 겨우 집밥의 변주일 뿐인데도 이렇게 신경이 쓰이니...


한 끼의 집밥 따위 굶어도 그만이고 빵을 먹어도 그만이다. 너무 많이 먹어 문제지 못 먹어 문제 되는 시절이 아니지 않은가. 아마도 어디선가 보고 계실 것만 같은 시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이 신경 쓰였던 것은 아닐까. 당신의 막내아들이 따뜻한 국이 곁들여진 든든한 저녁 대신 말라 삐뚤어진 식빵을 가슴 쳐가며 먹고 있을 장면을 생각하며 밤잠 설치실 것을 생각하니 괜히 찔렸던 것일 수 있다. 더 솔직히 말해, 남편의 얼굴에 내 아들들의 얼굴이 오버랩되고 시어머니 얼굴에는 내 얼굴이 겹치면서 '내 새끼가 저렇게 밥도 못 얻어먹고 저녁에 빵 쪼가리나 먹고 있으면 어떡하누?'라는 시어머니스러운 고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상일랑 얼른 머리를 흔들어 날려버려야겠다. 내 손으로 직접 집밥의 변주곡을 써 내려갔으니 다른 집 밥상의 변주곡에는 신경 쓰지 말지어다. TPO에 맞거나 말거나, 미래의 아들 가족이 저녁으로 토스트를 먹거나 굶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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