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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an 17. 2021

1월 중순에 김장을 해도 되는 이유

늦어도 한참 늦었다.

11월부터 서두르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맘이 동하지 않았다.

12월, 뉴스마다 올해 김장값이 얼마네 해도 남 얘기 같았다.

아들의 입시와 남편의 시험을 핑계로 2020년을 넘겨버렸다. 그보다는 아직도 먹을 김치가 있다는 이유가 컸다. 작년, 아니 2019년 12월에 했던 김장김치가 아직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유와 게으름 어디쯤에서 미적거리다가 벼랑 끝까지 내몰려서야, 마지막 김치로 김치찌개를 끓이고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1월 중순이었다.


1월 중순은 김장을 하기에는 한참 늦은 때임을 처음 알았다.

1월의 시장에는 홍갓도 청갓도 없었다. 팔딱팔딱 살아있는 김장용 생새우도 자취를 감췄다. 산지에 주문했다가 품절됐다는 아쉬운 전화만 받았다.

쪽파는 평소보다 2.5배 비싸졌고 하나로마트 한쪽에 자리를 잡았던 젓갈 코너는 사라졌다. 절임배추 10kg 한 박스는 김장시즌 때보다 만원이나 더 비싸졌다. 이래저래 최악의 조건이다.


인생에는 다 때가 있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싶었다. 남들이 그때 서둘러 김장을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괜히 급한 성질을 못 이겨 그리 한 게 아니었다.

'공부도 다 때가 있다, 결혼도 다 때가 있다'면서 그 나이 때에 해야 하는 일들을 강조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싶었다. 뒤늦은 김장을 하면서 주먹으로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그런데, 버스 한번 놓쳤다고 집에 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김장시즌을 놓쳤다고, 김치에 넣을 채소값이 올랐다고 김치를 못 담글 리 없다.

비싼 절임배추 대신 3포기에 5천 원짜리 배추 두 망을 주문했다. 붉은 새우로 담갔다는 북새우젓을 생새우 대신 준비해봤다. 비싼 쪽파와 미나리는 한 단씩만 준비해 서운함만 달래주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만큼만 준비를 했다.


예년보다 배추 양도 적고 갓도 없고 쪽파도 실컷 못 넣었지만 김장 분위기는 제대로 내보았다. 전날 밤 절인 배추를 씻고 야채를 다듬느라 아침부터 분주했다. 남편은 굴과 홍어를 사러 장에 다녀왔고 그 사이 나는 김치통을 씻어놓고 수육을 삶았다.

잘 절여진 배추에 속을 넣을 때 남편을 동원했고, 가장 맛있어 보이는 작고 노란 배춧잎에 속을 싸 먹으며 간을 보는 데는 아들을 동원했다.

쌓아놓은 김치통을 보며 흐뭇한 마음도 작년과 매한가지였고 수육에 막걸리까지 먹어 거나해진 몸으로 따뜻한 이불속에 누워 행복해하는 것도 예년과 다름없었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은, 그 '때'라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이 동하는 때를 뜻함이 아닐까.

남들 다 할 때를 뜻함이 아니고 내가 가장 즐겁게, 맘 편히 할 수 있는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갓도 안 들어가고 생새우도 못 넣었지만 김치라는 게 라면 먹을 때 아쉽지만 않으면 그만 아닐까.


학창 시절  남들 공부할 때 안 했어도 살다가 필요할 때, 여건이 될 때 정신 차려하면 된다.

결혼적령기니 뭐니 해서 남들 결혼하고 애 낳는 수순을 밟지 못했어도, 의외의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연을 만나 실컷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혼자 사는 게 좋으면 그리해도 그만이다.


철이 한참 지난 김장을 해놓고도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누워있으니 그저 흐뭇하다. 쓸 소재가 생겼다고 좋다며 글을 끄적이고 있으니, 1월 김장도 해볼 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1월 중순이 김장하기 딱 좋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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