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Feb 08. 2021

묵 쑤듯이 살아보자.

쑤다 : 곡식의 알이나 가루를 물에 끓여 익혀서 죽이나 메주 따위를 만들다.

아들의 치아교정이 마무리됐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부착한 교정기를 2년 반이 지난 작년 이맘때쯤 떼어냈고 이후로 1년 동안 탈착이 가능한 유지장치를 하고 있었다. 오늘 검진에서는 교정이 변형 없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촬영을 했고 문제없이 잘 됐다는 결과를 들었다. 가능하다면 1년간 유지장치를 더 하라는 권고를 듣고 병원을 나섰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과정이 끝난 것이다.


중학교 1학년 여름, 사전 검사를 하고 받은 교정 비용 견적은 550만 원이었다. 소개받은 일반병원보다 200이나 비쌌던 대학병원은 갈 때마다 진료비도 따로 내야 했다. 하지만 아이는, 손에서 담배냄새가 나고 입가에 침이 가득 고인, 소개받은 개인병원 선생님 대신 빈틈없이 관리해주는 간호 선생님들과 친절하고 젊은 의사 선생님이 계신 대학병원을 원했다.

12개월 할부로 교정비용을 결제하고 첫 진료를 받던 날. 불편하고 아픈 교정기를 달고 집에 가면 '언제 끝나...' 하며 울상을 짓던 아들만큼이나 나 역시 '12개월 할부가 끝나는 날이 오기는 올까.'라며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끝은 요원해 보였지만 예약한 검진일이 되고 '벌써 한 달이 지났어?' 하며 진료를 받다 보니, 카드 할부가 끝났고  교정기를 떼는 날도 왔다. 첫 교정을 시작한 지 3년 반만인 오늘, 묵묵히 하다 보면 끝이 있음을 새삼 느꼈다.


아직 살날이 많고 배워야 할 것이 많겠지만, 인생은 묵 쑤듯이 살면 그럭저럭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 전, 우리 집 도토리묵 쑤기 담당은 아버지였다. 명절이나 제사 때면 으레 묵을 쑤며 가스불 앞에 한참을 서계셨다. 결혼 10년 후쯤 됐을까? 살림이 손에 익었을 무렵, 하나로마트에서 국산 도토리 가루를 한봉 사서 묵을 쑤어본 이후로는 사지 않고 직접 쑤어 먹었다. 사는 것은 집에서 만든 것만큼 쌉싸르한 맛이 덜했고, 뜨거울 때 그릇에 부어 굳혀야 하는 묵의 특성을 고려할 때 플라스틱 용기에 굳힌 묵을 먹는 것이 찜찜해서였다. 하지만, 잘 굳어 탱글탱글한 묵을 받아먹기만 할 때는 몰랐다. 그게 얼마나 지난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음식인지 말이다.


1. 섞는다.

2. 끓인다.

3. 식힌다.

도토리묵을 만드는 법은 마치 '태어난다, 산다, 죽는다'처럼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삶의 어느 과정 하나 녹록지 않은 것처럼 도토리묵을 쑤는 과정도 녹록지 않다.

1. 섞는다.

잘 섞어야 한다. 도토리묵가루 봉투 뒷면마다 쓰여있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가루와 물의 비율이 1:4부터 1:6까지 천차만별이다. 소량의 소금을 섞으라는 곳, 식용유도 넣으라는 등 Tip도 다르다. 그러니 섞는 순간부터 나만의 배합비율을 찾아내야 한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찾아낸 소금 적당량과 포도씨유 한 바퀴를 둘러주고 1:5쯤에서 타협을 본 후 섞어준다.

2. 끓인다.

O분을 저어라, O분을 뜸 들여라, O분을 더 저어라. 의견이 분분하다. 끓이는 목적이 도토리묵 가루를 익히고 잘 엉겨 붙기 위해서라는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잘 익은 도토리묵 냄새가 날 때까지, 묽었던 배합물의 농도가 적당해질 때까지, 바닥이 눌치 않도록 계속 저어주면서... 지루하고 팔 아프지만 한쪽 방향으로 꿋꿋하게 계속 저어주며 끓인다.

3. 식힌다.

어느 시점이 멈출 타이밍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잘 익은 냄새가 나고 적당히 되직해졌을때 깨끗이 닦은 유리용기에 옮겨 닮는다. 실리콘 주걱으로 냄비 벽과 바닥에 잔뜩 묻어있는 녀석들을 말끔하게 제거한다. 그릇에 옮겨 담은, 액체도 고체도 아닌 것의 윗면을 평평하게 다듬어주고 서늘한 베란다로 옮긴다. 빨리 굳히겠다고 냉장고로 옮겼다가는 탱탱함 대신 푸석함을, 도토리 냄새 대신 반찬 냄새를 품은 도토리묵을 먹게 되니 조심해야 한다.

각 단계마다 신경 쓸 것들이 있고 고단한 과정이다.


몇 년 전,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이천으로 강의를 다닌 적이 있었다. 남들은 여행 가느라 막히는 토요일 도로 위를 오고 가던 24주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한주 한주 지워가며 다니다 보니 수료식 날이 됐다. 40여 명의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님들이 한자리에 모여 수료식을 하고 한 명 한 명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한 학부모님이 작은 쇼핑백을 건네셨다. "뭐 이런 걸 다~"라며 받아 들고 집에 와서 보니 도토리가루였다. 친정어머니가 직접 채취하고 만드셨다는 쪽지와 함께였다. 그게 어떤 정성인지 알았기에 어떤 선물과 감사인사보다도 기억에 남는다.

 

도토리묵가루는 단순히 도토리를 말려서 갈아낸 게 아니란다. 한 톨 한 톨 주운 도토리의 껍질을 까서 물에 불리고 다시 바짝 말린다. 마른 도토리를 분쇄한 후 면포에 넣는다. 이걸 물에 넣고 조물딱 거리며 전분물을 만든다. 최대한 많이 만든 전분물을 한참 놔두면 바닥에 앙금이 가라앉는데 이걸 조심스레 건져 말린 것이 도토리묵 가루다. 그 귀한 걸 나눠주셨다는 것에 감사했고 24주간 성실히 오가며 수업한 나의 한 해가 충분히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열심히 버티니 비로소 좋은 끝이 온 것이다.


간단한 듯 하지만 간단치 않은 도토리묵만큼이나 우리네 삶도 단순한 듯 하지만 복잡하고 힘들다. 하지만 나만의 방식을 찾아내면 된다. 멈추거나 지치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내면 된다. 묵을 쑤는 것과 인생 모두 '소신, 정성, 끝이 있다는 믿음' 이 세 가지가 엮는 콜라보가 아닐까. 소신껏 정성을 다해야 후회가 없으며 힘들더라도 끝은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끈기 있게 버틸만하기 때문이다.

묵 쑤는 마음으로 인생을 쑤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1월 중순에 김장을 해도 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