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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Feb 10. 2021

나만을 위한 팥칼국수

며칠 전 어머님과 성묘를 다녀오는 길에 작은아버님 댁에 들렀다. 갈 때마다 트렁크 가득 손수 지은 농산물을 실어주시는 통에 찾아뵙는 것도 죄송스럽다. 집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다 보니 메주콩, 검은콩, 들깨 사이로 팥이 보였다. 떡을 해 먹기에는 적은 양. 뭘 해볼까 고민하다 불현듯 팥칼국수가 떠올랐다.


팥을 푹 삶아 도깨비방망이로 곱게 갈고 살짝 삶아놓은 칼국수 면을 넣어 다시 푹 끓였다. 그릇에 옮겨 담고 소금, 설탕 간을 했다. 팥죽을 한 숟가락 떠먹고 국수를 후루룩 한입. 아니다. 팥칼국수는 숟가락으로 먹어야 맛있다. 젓가락으로 들어 올린 면을 숟가락에 살포시 말아 얹어 놓고 그 위에 김치를 얹어 입으로 넣었다. 남아있던 김치 속을 얹으니 별미다. 무말랭이 무침도 잘 어울린다. 그렇게 그득하게 혼자 배를 불렸다. 나 혼자 먹겠다고 팥칼국수를 해 먹다니... 내가 팥칼국수를 이렇게 좋아했었나?


15년 전쯤, 어린 손자들이 여럿이었던 어머님께서는 애들 어릴 때나 다니지 않겠냐며 가족 여행을 제안하셨다. 이혼하신 아주버님의 어린 자녀들을 돌봐주고 계셨으니 제대로 된 가족여행을 데리고 다니고픈 마음이 크셨을 것이다. 덕분에 설에는 따뜻한 휴양지로, 여름에는 아버님 산소가 있는 서해안으로 여행을 갔다. 아이들이 크면서 이러저러한 사정에 의해 계속되지는 못했다. 해외, 국내 합쳐 대여섯 번이나 될까? 돌이켜보면 정겹고 훈훈한 기억이지만, 결혼 6,7년 차의 외며느리에게는 가족여행도 일의 연장이라고 느껴졌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해외는 나았다. 적어도 바리바리 먹거리를 챙겨갈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리조트에서 삼시세끼 해결할 수 있었고 고만고만한 사내 녀석들은 수영장에서 나올 줄 몰랐으니, 시댁 식구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도 마냥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국내여행은 사정이 달랐다.

어머님은 여행을 앞두고 김치와 밑반찬을 만드느라 분주하셨다. 그것도 모자라 서산시장에 들러 말린 생선, 데쳐먹을 주꾸미나 낙지, 각종 채소, 과일들을 잔뜩 사셨다. 기껏해야 이틀에서 사흘 있을 펜션 냉장고는 꽉꽉 채워졌다. "회라도 먹으러 가자고 바람을 좀 잡아봐~"라며 남편 옆구리를 찔러봤지만 막내아들은 힘이 없었다. 어머님은 "이 많은 식구가 어디 들어가서 밥을 먹을 수 있겠냐?"며 한사코 집밥, 아니 숙소 밥을 고집하셨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처음보다 곱절은 늘어난 식량을 챙겨서 돌아와야 했던 기억이 난다.


저녁 어스름이 깔릴 때면 태안에 사시는 작은아버님, 작은어머님께서 합류하시곤 했는데 절대 빈손으로 오시는 분들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온 형님댁 가족들을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시장에서 실한 생선이나 조개를 잔뜩 사 오시곤 했다. 언젠가는 저 멀리서 걸어오시는데 작은어머님 손에는 큼지막한 들통이, 작은아버님의 어깨에는 밀가루 한포대가 함께였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설마... 설마...' 하며 외면하고 싶었다. 그게 뭐가 됐든 내 일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이제 좀 쉬나 싶던 참이었다. 8살, 7살의 조카와 6살, 3살의 우리 집 아이들까지, 사내아이 넷을 쪼르르 세워놓고 샤워를 시키느라 진이 다 빠진 터였다. 점심에 먹던 반찬을 다시 차려놓고 대충 한 끼 때우려던 내 작디작은 소망은 들통 속을 확인한 후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그 안에는 통통하게 삶아진 팥이 담겨있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드릴 것도 읎고... 근디 작년에 팥이 아주 잘 됐슈~ 팥칼국수 해먹으니께 맛있더구먼~ 쪼끔 해 먹으면 뭔 맛이 있대유? 이렇게 식구들 잰뜩 모였을 때 같이 해 먹으면 맛있쥬~"

작은어머님의 서론이 끝남과 동시에 조용히 반죽을 시작했다.

언제? 여름휴가에서...

어디서? 펜션에서...

무엇을? 칼국수 반죽을...

왜? 온 가족이 함께 맛있게 먹으려고...

어떻게? 묵묵히... 열심히...

누가? 내가! 내가!!!!


열댓 명이 먹을 팥칼국수 반죽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날리 없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읊조리며 마음을 다스릴 내공도, 연륜도 없던 며느리였다. 속에 화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반죽을 해댔을 것이다. 다만, 가족들이 모두 모인 것만으로도 즐거워하시고 새끼들 입에 뭐 들어가는 것만 봐도 신나 하시던 어르신들은 확실히 기억난다.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펜션 부엌에서조차 생선을 찌고 찌개를 끓이고 심지어 팥칼국수를 끓이던 정성... 혹은 극성...


그 시절 난 뭐가 그리 맘에 안 들었을까? 왜 가족들이 두런두런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모습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던 걸까? 시어머님, 시이모님들, 시작은 어머님은 느꼈던 행복을 왜 나만 못 느꼈을까?

끊임없이 밀려드는 설거지? 설거지가 끝나면 바로 준비해야 하던 다음 끼니? 답답한 속만큼이나 꽉 차 있던 냉장고? 식구들이 다 먹고 나서야 겨우 한술 뜨던 밥? 그마저도 매일 먹던 집밥이라서?


많은 며느리들이 느끼는 고달픔은, '시'자 들어간 가족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다. 당신들이 느끼는 기쁨의 근원이 며느리에게도 기쁨이요, 당신들이 느끼는 당연한 불편함이 며느리에게도 당연한 것이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때의 나도, 그런 게 행복이라고 느낄 마음의 준비가 안돼 있었다. 아니, 그들만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지에서 밀가루 반죽을 해 가족을 먹이는 것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나만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다는데서 오는 서러움... 그렇다고 거기에 반기를 들지도 못했고 싫은 내색도 하지 못했다.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이것 하나 못 해 드리나 하는 심정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기껏 한다는 반항은 "배불러서 못 먹겠어요..."라며 거부하는 정도였다. 몇 번을 권하셔도 웃으며 사양하기...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에 걸린 위선자였다.


설이다.

어머님은 가족들 먹일 생각에 벌써부터 갈비찜을 하시고 김치를 담그시느라 분주하시다.

"5인 이상 집함금지인데요..."라는 나의 소심하고 작은 외침은 공중분해됐다. 연로하신 어머니의 소소한 행복을 가로막을 수 없는 착한 아들 역시 나서지 못한다.

"신고 들어올 텐데요..."라고 한번 더 용기 내어 보지만 어머님은 너무 해맑으시다. 차마 막아설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깟 밥 한 끼 안 먹는다고 뭐 어떻게 되는가 싶어 답답하지만 15년 전만큼 마음에 뿔이 나고 심통이 나지는 않으니 이상할 노릇이다. 가족이 둘러앉은 그깟 밥 한 끼를 인생 최대의 행복이라 여기는 팔순 노모의 마음이 이제는 이해가 되는 까닭이다.


이해는 이해고...

어머님의 맘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거절할 방법을 여전히 찾지 못한 나는... 착한 며느리, 위선자를 넘어... 범법자 딱지까지 달게 생겼다.


가끔 남편은 내가 아주 극성스러운 시어머니가 될 것 같다고 장담하곤 한다. 아들들에게 엄마 밥을 해주려고 난리를 피울 것이며 아들 밥을 챙겨주지 않는 며느리를 못마땅해할 거라나? 글쎄... 그는 나를 얼마나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걸까...

난, 내가 차린 음식을 가족들이 맛있게 먹어주는데서 희열과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 나 혼자 먹자고 정성 들여 팥칼국수를 끓이고 식탁에 혼자 앉아 먹으면서도 "왜 이리 맛있어?"를 연발하며 행복한 사람이다. 배고픈 가족들의 끼니를 책임지는 자로서 본분에 충실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난...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을 좋아한단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를 나의 변심을 막기 위해... 이 글이 성지글이 되어 나의 평생을 쫓아다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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