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Mar 05. 2021

성공의 어머니는 실패가 아니었다.

전통혼례음식 1급 지도사 자격증

전통병과 1급 지도사 자격증

10년 전 취득한 이 자격증으로 난 전통음식 전문가의 타이틀을 달았다. 주 종목은 육포와 떡이었다. 한때는 명절 대목을 실감하며 바쁜 적도 있었지만 요 몇 년간은 잊지 않고 찾는 이들 덕에 근근이 간식비를 버는 수준.


10년의 내공으로 육포와 떡이라면 눈감고도 할 수 있게 됐다. 계량스푼과 저울은 거들 뿐이었고 레시피 따위는 볼 필요 없었다. '장사 하루 이틀 해? 떡 하루 이틀 쪄? 육포 하루 이틀 말려?'라며 오만해지려 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쯤이면 기특하게도 자제하는 마음이 같이 올라왔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해. 큰 코 다칠 수 있어. 돈 받고 파는 일이니 점검 또 점검, 조심 또 조심해야지. 경거망동과 자만을 버려. 좋은 시절 또한 지나갈 수 있음을 명심해!'


머릿속 레시피가 지워지지 않을 만큼, 손이 굳지 않을 만큼, 냉동실 속 쌀가루가 비지 않을 만큼 꾸준히 해왔다. 그러던 것이 혼란스러운 작년을 맞이하며 손을 놓게 됐다. 주문은 없었고 동시에 의욕도 사라졌다. 쌀가루를 채워놓아야 한다는 강박도 안 생겼고 감각이 잊힐 것도 불안하지 않았다. 늘 해오던 일 그까짓 것, 닥치면 또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아주 오랜만에 지인 소개로 사무실 개업 떡 주문이 들어왔다. 작은 사각 시루에 세켜로 쪄내어 보자기 포장을 해 드리면 받으시는 분들마다 만족스러워하는 떡이다. 팥은 국산만을 고집하고 가운데 한켜에는 집에서 말린 호박고지를 넣는다. 찹쌀가루와 멥쌀가루를 반반씩 섞어 찔깃하지 않으며 식어도 퍽퍽하지 않다. 지인의 개업식에서 떡을 드셔 보신 분이 너무 맛있었다며 본인의 개업식에도 올리고 싶다고 주문하셨다. 감사한 마음에 정성 가득한 떡을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떡을 할 때는 주문시간을 못 맞출까 잠도 푹 못 잤고 자더라도 밤새 악몽을 꾸곤 했다. 팥은 전날 삶아두고 모든 도구를 꺼내놓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했다. 모든 게 익숙해진 순간부터는 일의 효율을 따졌다.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늘 같은 퀄리티의 결과물이 나오도록 노력했다.

이번에도 하루 전에 재료를 점검했다. 얼마 전 빻아놓은 멥쌀가루가 냉동실에 있으니 찹쌀만 빻으면 되고 팥도 사둔 것이 있으니 당일 아침에 삶으면 준비 끝이다. 오래간만에 떡을 하게 된 김에 지인들을 위한 소시지 떡도 하자 싶어 두툼한 비엔나소시지를 준비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이미 오랜 시절 실수, 실패를 많이 해본 나였다. 엄청난 양을 해본 적도 있고 며칠 동안 쉬지 않고 해 본 적도 있는 일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성공이 당연한 일이 되었으니 오늘도 걱정할 것 하나 없었다.


시간이 여유로워 소시지 떡부터 했다. 소시지 떡을 25분 찌는 동안 시루떡을 준비하고 찜기에서 소시지 떡을 내리면서 시루떡을 올리기로 했다. 그렇게 해도 한 시간 정도가 남을 것 같았다. '역시, 베테랑이군!' 하며 자족했다. 소시지 떡이 익기를 기다리며 포장재료를 식탁 위에 준비했다. 오매불 소시지 떡을 기다리는 지인들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할 생각에 설렜다.

시간이 됐다. 당연히 잘 쪄졌을 떡을 기대하며 뚜껑을 열다가, 다시 뚜껑을 덮어버렸다. 외면하고 싶었다. 악몽인가... 이런 걸 두고 폭망이라 하던가...


미리 낸 칼집을 따라 하나씩 톡톡 떨어지게 쪄져야 하는 소시지 떡은 사이좋게 한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그것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찰떡같은 사이', 아니 진짜 소시지 찰떡이 되어있었다. 멥쌀가루인 줄 알고 신나게 만들었던 것이 실은 찹쌀가루였던 것이다. 얼마 전 가루를 만들어두었다는 기억은 맞았지만 멥쌀이 아니라 찹쌀이었다는 기억은 날아간 것이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고자 견출지에 <멥쌀가루>, <찹쌀가루>라고 써놓는데 이번에는 그게 없길래 당연히 멥쌀이겠거니 한 것이 화근이었다.


소시지 떡은 그렇다 쳐도 돈 받고 주문받은 시루떡은 어쩔 것인가.

정신없이 떡집으로 달려가 멥쌀가루 1kg을 사 왔다. 찹쌀가루 1kg과 섞어 원래 만들던 방식 그대로 차질 없이 떡을 찌기 시작했다. 돌발상황은 있었지만 약속시간 30분 전에 완성을 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주문하신 분께 떡을 전해드리고 나서야 폭탄 맞은 부엌과 그보다 큰 폭탄이 떨어진 내 머릿속이 보였다.


소시지 떡을 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떡집이 문연 시간이 아니어서 멥쌀가루를 살 수 없었다면?

사러 갈 시간 여유가 없었다면?

미리 다른 떡을 해보지 않고 시루떡을 바로 해버렸다면 나만의 황금비율을 자랑하는 시루떡 대신 찰시루떡이 됐을 것이다. 게다가 찹쌀은 멥쌀보다 찌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니 약속된 시간을 못 맞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고서야 오는 아찔함, 서늘함, 두려움으로 맥이 풀려버렸다.


오늘의 떡 주문은, 완수는 했으나 성공이 아닌 참담한 실패였다. 믿었던 나 자신에게 발등이 찍힌 꼴이었고 나무에서 떨어져 팔다리 부러진 원숭이가 된 셈이었다.

실패를 해본 적이 없어서 성공을 못한 게 아니었다. 실패한 기억도 성공한 기억도 오래요, 떡을 안 한 것도 오래 주문을 받았던 것도 오래였기 때문이다. 감각은 둔해졌고 오만함을 누를 겸손함도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동작을 멈췄던 기계는 예열하는데 오래 걸리고 흐름을 되찾는 것도 더디다. 조이고 닦고 기름칠해가며 멈추지 않았던 기계가 더 효율이 좋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성공의 비결은, 꾸준함이었다.


혹자는 그럴지 모르겠다. 찰떡이 되어 망쳐버린 소시지 떡을 먹어보았더니 기존에 없던 독특한 맛이라 대박 나는 것 아니냐고. 우연한 실수가 놀라운 발견을 이끌어낸 것 아니겠냐고. 그렇다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맞다고.

뭐... 맛이 없다고 볼 순 없었지만 비주얼이 영 아니었다. 기존에 만들던 소시지 떡에 비해 나을 것이 하나 없었다. 놀라운 발견도 아닐뿐더러 대박은 더더욱 아닐, 흑역사로 남을 실패가 맞다.


그러니 다시 강조하건대, 성공의 비결은 자만하지 않으면 묵묵히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다.


원래 소시지 설기떡은 왼쪽 사진과 같아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만을 위한 팥칼국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