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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Feb 11. 2021

< 스틸 스탠딩 > - 래리 호건, 엘리스 헤니칸

내일의 나를, 내일의 정치를 정의한다.

연일 100명 안팎의 확진자가 나오고 초, 중, 고등학교의 등교가 수차례 연기되던 2020년 3월 말. 공적 마스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코앞까지 다가온 감염 위험을 걱정하던 나에게 미국의 '한국 사위' 주지사가 한국에서 코로나19 진단키트를 공수했다는 소식은 전혀 관심 밖의 이야기였다. 왜 한국 사위라 불리는지, 왜 한국에서 진단키트를 사 가는지를 궁금해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보다 상황은 나아진 것이 없고 일 확진자 수는 400명 안팎에 머물러있지만 1년 동안의 격변은 500페이지에 달하는 미국 주지사의 자서전을 읽을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주었다.


< 스틸 스탠딩 >은 자서전의 전형에 맞는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배우다'에서는 래리 호건의 성장 배경과 부모의 이혼, 그의 정치적 롤 모델이 된 아버지, 마흔 넘어서까지 고수하던 독신주의를 청산하게 만든 아내 유미와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2부 출마하다'에서는 확고한 민주당 우세 지역에서 초당적인 메시지로 승리를 이룬 이야기를,

'3부. 이끌다'에서는 볼티모어 폭동에 대응하며 신뢰받는 주지사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4부. 치유하다'에서는 림프암 3기를 선고받고 치료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그 경험이 주지사직 수행에 미친 영향을 풀어낸다.

'5부. 통합하다'를 통해 분열과 비상식이 만연해진 미국 정치판에서 통합과 상식의 리더십을 찾는 과정을,

'6부. 생명을 구하다'에서 코로나19에 맞선 '효과적인 독립 리더십'으로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한 개인의 삶이지만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그의 삶을 함께 따라가보니 크게 세 가지 화두가 내게 던져졌다.

첫째, 진정한 리더란 무엇인가.

둘째, 정당정치와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셋째, 대한민국의 유권자인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자못 거창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인간의 삶이 곧 정치라는 생각으로 래리 호건의 삶을 짚어가며 하나하나 고민해 보고자 한다.


첫째, 진정한 리더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진정한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 자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되겠다. 전문성, 공정성, 추진력, 창의성, 존중, 배려 등 긍정적 가치를 죄다 끌어모아야 할 만큼 리더에게 완벽한 인간상을 요구하는 게 일반적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큰 부담감을 짊어진 사람이 리더다. 완벽을 기대하는 대중에 영합해 완벽함을 연기하는 사람이 리더랄까? 하지만 이 책에서 래리 호건이 보여준 리더는 결이 달랐다. 그는 타인에 의해 내려진 리더의 정의 대신 시시각각 변하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리더의 모습을 재정의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리더란, 국민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다.

미국 어느 주보다도 민주당 등록 당원의 비율이 높은 메릴랜드의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그는 당을 초월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직접적인 슬로건을 내세운다. 'Change Maryland!'

"우리가 직면한 이 심각한 문제는 공화당 문제도 아니고 민주당 문제도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함께 앉아 손을 부여잡고 실제적이고 초당적이며 상식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p150)

총기와 낙태, 동성 결혼 등 법적으로 결론이 난 논쟁에 휘말려 소모전을 펼치는 대신 메릴랜드주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인 세금과 경제적 문제를 논쟁의 중심에 올렸다.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라는 것이 더 중요한 지점이다. 주지사 4년의 임기 동안 그는 50개 주중 49위였던 경제 성과를 8위로, 교육과 교통 개선에 대한 투자를 사상 최고치로 올려놓았다. 오마마케어의 부족한 부분을 손봐 건강보험 혜택을 유지시켰으며 세금 인상 없이 수질개선을 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시끄럽게 떠들기만 한 게 아니라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이다.


리더란, 분열이 아닌 통합을 이루는 사람이다.

25세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청년 프레디 그레이가 경찰에 연행되다가 사망한 사건에 의해 촉발된 볼티모어 폭동은 래리 호건이 주지사로 부임한지 반년이 채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평화적인 시위대와 폭도들 사이에서 래리 호건은 단호하되 절제된 공권력으로 대응했고 동시에 도시 보호와 평화의 회복이 우선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충분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해도 그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라며 공권력의 위엄과 즉각적인 문제 해결을 중시하면서도 리더란 '최고 위로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분노에 가득 찬 시민의 말을 들어주는 것, 어느 당의 정치인이든 신뢰할 수 없고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아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여주는 것. 그래서 시민들이 가진 공통의 문제를 해결해 줄 '당'이 아닌 '사람'이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 그것이 그가 보여준 통합의 리더십이었다.

"저는 오늘날 미국에서 우리를 분열시키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훨씬 더 많이 있다고 믿습니다."(p432)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의 시대에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70%, 민주 당원의 73%, 여성의 75%, 공화 당원의 77%, 무당파의 78%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주지사에 재당선됐다.

"이 위대한 주의 주민들은 정중함과 초당파주의, 상식적인 리더십을 위해 투표했습니다"(p385)


둘째, 정당정치와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있는 현실에서 다양한 갈등은 정당정치의 필수조건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갈등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정당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정책으로 경쟁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공통의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정치권력을 획득한다는 목적하에 이익집단과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여준다.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거나 지역주의를 표방하기도 한다. 이념과 정책집단으로서 정의롭고 합리적인 경쟁을 하는 본래의 기능을 잃고 편을 가르고 갈등을 극대화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것 같다.


래리 호건은 이러한 당파성에 직접적으로 반기를 든 인물이다. 워터게이트 스캔들 당시, 공화당 하원 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닉슨의 탄핵을 촉구했고 탄핵소추안 세 가지 모두에 찬성 표를 던졌던 유일한 공화당 의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래리 호건은 공화당이기 때문에 무조건 당론을 신봉하거나 사실 자체를 외면하는 행태를 거부했다.

"당파의 이익보다는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모욕이 토론을 대체하고, 비난이 협상을 대체하고, 교착 상태가 타협을 대체하는 그런 정치, 흥분과 손가락질과 증오가 빛을 가려 분열과 기능부전만 초래하는 그런 정치, 국민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더 이상 우선순위가 아닌 그런 정치는 단호히 거부하고 비난해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모든 해답이나 모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정부, 다양한 국민을 적으로 만들거나 그들의 애국심을 의심하지 않고 다양한 반대 의견을 용인하는 정부, 위협하는 게 아니라 설득하기 위해, 악마로 몰아세우거나 무찌르는 게 아니라 격려하기 위해 열정만큼이나 예의를 갖춰 토론하고 논의할 수 있는 정부, 우리는 그런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 p400)


결국,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추상적인 가치와 어느 한 사람의 논리를 따라가느라 국민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만이 국민이라며 그들의 목소리가 전체인 양 착각하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에 담긴 공통의 문제를 찾아내 해결책을 모색하는 정당. 그것이 진정한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의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셋째, 대한민국의 유권자인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4월 보궐선거와 2022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이 시점에,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다른 나라 주지사의 자서전을 읽고 너무 멀리 나가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의 삶을 통해 엿본 미국의 정치는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비방과 무례가 난무하고 분열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서로 간을 보며 말장난을 일삼으며 정치게임에만 혈안이 됐다.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 국민들에게 명확하고 구체적인 해결책 대신 갈등을 조장하는 정책만을 허공에 뿌리고 있다. 당과 당의 정책을 신뢰하며 결국에는 이 사태를 수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진지 오래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수면 위로 떠오른 갈등들은 정치 이슈로 소비만 되고 끝나버렸다.


정치가 삶을 바꿔줄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진 지금, 그나마 덜 나쁜 놈을 골라야 하는 순간 국민이 느껴야 하는 절망과 떨어지는 자존감은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래리 호건의 말에서 나는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당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고 진보를 이루고 메릴랜드에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공동의 목적과 통합된 책무에 있습니다."
"함께 힘을 모으면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p339)


보라색 서프보드를 들면서,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이 푸르른 해에 이 푸르디푸른 주에서, 내가 서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라고 연설한 래리 호건 같은 리더를 기대해본다.


추상적인 당론에 휩싸이기보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

분열된 국민을 통합하고 양측 모두 수긍할 수 있는 투명하고 명확한 해결책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

국민을 위한다는 공직자로서의 책무와 신뢰를 중시하는 사람.


자서전 한 권으로 래리 호건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책에 가려져 공직자 이면의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됐을 수도 있다. 우리가 정치인을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언론을 통해 비친 모습으로 그들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정치인들의 말 한마디, 공약, 정책으로 그들을 막연히 평가할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감춰줬던 모습들이 드러날 때 더 큰 배신감과 절망을 느끼기도 한다.


따라서 위에 열거한 리더의 여러 덕목들에 더해 개인적인 소망, 바램을 하나 첨언하자면...

'공직자로서 추구하고 강조했던 가치와 덕목들, 일구었던 성과들이 너무나도 달랐던 개인의 삶으로 인해 무너지는 일이 없는 사람'이 우리의 리더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 사람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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