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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pr 28. 2021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연(삶의 촉수)

암은 등이다.

뽀얀 등. 화장실 문틈 사이로 보이던 엄마의 흐느끼던 등.

내게 암은 그렇게 기억된다.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기다리던, 지금의 내 나이였던 엄마는 때를 밀다 말고 그렇게 울고 있었다.


암은 소주다.

맥주잔 가득 담긴 소주.

다음날 엄마의 수술을 앞두고 아버지는 안주도 없이 소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우셨는지 어땠는지는 모른다. 차마 아버지의 눈을 따라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만 "나쁜 놈의 새끼들. 의사라는 놈들이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해!"라고 구시렁거리던 입만 쳐다봤다.


무려 22년 전의 기억이다.

이연 작가님의 <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를 읽으며 소환된 암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서글펐다. 엄마는 자신의 자궁을 내어주고 일찌감치 암과의 동거를 끝냈다. 이른 갱년기를 맞이했고 여기저기 아픈 게 일상이 됐지만 그건 언제부턴가 암 때문이 아니라 노화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전히 잘 살고 계신다.


브런치에서 만난 작가님의 글을 통해 그녀가 암 환우임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 눈에 '암 환우'라는 필터가 장착됐다. 나는 차곡차곡 올라오는 그녀의 글을 성실히 읽는 이웃이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암을 떠올리느라 글은 늘 슬프게 다가왔다. 그런데, 같은 글인데도 책으로 읽은 그녀의 이야기는 제목만큼이나 담담했다. 눈앞이 뿌여 지기는 했지만 분명 슬픔을 전달하고자 하는 글, 책은 아니었다.


"몸에 침투한 암과 함께 시간은 다시 휘었다."(p16)
"뭘 피하려고 저렇게 방향을 틀었을까? 그런 나무 앞에 서면 온몸을 비틀며 방향을 틀고 있는 내가 보였다. 살기 위해선 방향을 틀어야 해. 나무도, 나도"(p158)


암은 분명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휘고 비틀게 만든 사건이었다. 발병 이전과 이후의 삶을 끊임없이 비교 분석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멈칫, 했다. '순간'이라고 표현했지만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한 그녀는 말했다.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곳곳에서 발견했다. 암과 사는 그녀의 삶이 왜 달라지지 않았는지...



미래는 누구에게나 불투명하다. 의지로 통제 가능한 시제는 현재다. (p18)

암 환우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미래는 막연하다. 죽음의 증거들을 매일매일 확인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증거들을 확인하는 일은 고통스러울 테다. 하지만,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너무 냉정하려나...

그러니 현재를 살아야 한다. 내 손 닿는 여기, 내 숨길 흐르는 지금을.



그 여름. 매일 밤 병원 가는 길은 드라이브였다.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때, 나는 끔찍한 불행 속에서도 모래알보다 작은 행복을 기필코 뒤져서 찾아내는 나를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행복을 갈구하는 존재인지 확인했다. (p46)
새로운 증상이 생기고, 새로운 치료를 시작할 때마다 '정상'의 기준은 매번 치료 직전 상태로 업데이트됐다. (p51)

사람은 삶의 고난을 한 단계 넘길 때마다 기대하는 행복의 기준을 조금씩 낮춘다. 높이 설정했던 행복이 아니라 조금만 용기 내고 노력하면 손 닿을 곳에 있는 행복. 대운 말고 소확행. 한번 높아진 눈은 낮추기 힘들다지만, 살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그리 까탈스럽지 않다. 처음엔 투덜거리지만 금세 잊고 눈앞에 펼쳐진 작은 것들에서 행복을 찾기 마련 아니던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전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전보다 나은 존재. 울음을 그치고 고민의 방향을 틀었다.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
어떤 존재로 살고 싶은가 (p61)

발병, 지난한 치료, 재발의 3년을 지내며 작가는 존재와 삶에 대한 사유를 쉼 없이 했다. 이 책은 그 기록물이다. 살고 싶었다가 두려웠다가, 미웠다가 고마웠다가, 행복했다가 슬펐다가... 그러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암과 타협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의 과정 역시 암 환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매 순간 그러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이런 맘도 있지만 저런 맘도 있다. 그러다가 그 사이 적당한 지점 어딘가에서 정착을 한다. 그래야 오늘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 아닐까. 그녀 역시 미래가 아닌 오늘을 살기 위해 암을 끌어안고 살기로 한 것 아닐까...



"암은 생존을 겨냥한 날 선 위협이자 경고장이었다. " (p98)

암은 분명 여느 경고장과는 다르다.

작가가 얘기한 것처럼 감기와 한 라인에 놓고 비교하기는 더더욱 힘든 일이다. 암을 경험해보지 못한 내가 암만큼의 날 선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도 없다.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일이다.

암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암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는 어딘지 낯설지 않았다.

생존을 겨냥하는 모든 위협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삶... 어쩌면 그 모든 것과 맞바꾼듯한 암 앞에서 그녀는 까부라지고 맥을 못 추다가도 어느샌가 다시 부스스 일어났다.


작가는 그것이 나무와 숲 때문이라고 했다.

작가는 그것이 글쓰기 덕분이라고 했다.


온몸이 뒤틀려도, 쓰러져도 사는 건 다르지 않다고 나무들이 몸으로 말했다. 나무는 내 삶의 스승이자 벗이었다. (p158)
암이 게으른 내 몸을 합리화시켰다면, 글쓰기는 쓰는 행위의 주체인 나를 합리화시켰다. (p245)

과연 나무가 스승이었을까? 과연 글쓰기가 그녀를 합리화시켰을까?

과연 암이 그녀의 몸을 합리화시켰을까...

나무는 그저 제 삶을 살아갈 뿐이었다. 해가 좋아 쫓다가 휘었을 수도 있고 궁금한 게 많아 뒤척이다 비틀렸을 수도 있다. 전혀 상관없는 나무를 끌어다가 자신의 삶을 다독인 것은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이었다.

"암과 싸우지 말고 함께 살아가~"라고 숲이 말한 게 아니다.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은 것은 그녀가 그녀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 스스로 터득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녀가 여러 번 언급한 <코스모스>와 <그리스인 조르바>를 나도 좋아한다. 어쩜 그녀는 나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작가가 자신을 소개하는 페이지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어디서 날 보고 썼나?'싶었다. 멍 때리는 거 좋아하고 싫증 잘 내고, 누워있는 거 좋아하는 사람. 한없이 쓸데없이 사는 사람. 돈 안 되는 일만 골라 쫓아다니는 사람.

하지만 그녀는 나와 달랐다. 그녀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용기는 자신의 편견이 밖으로 드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또 찾아낸 결과가 자신의 희망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일지라도 코스모스의 조직과 구조를 끝까지 탐구하여 그 깊은 신비를 밝혀내려는 이들의 것이다.
(p538)
칼 세이건, <코스모스>

그녀는 자신의 행과 불행, 암과 함께 하는 삶의 조직과 구조를 끝까지 탐구하려는 3년을 보냈다. 그리고 그 깊은 신비를 밝혀냈다.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다는 것...


그녀의 필명인 '삶의 촉수'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구절...


나는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중략)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p400)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나 역시 작가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본다. 3년간 암과 치열하게 공존하며 만들어낸 그녀의 핏방울, 그 핏방울을 머금은 그녀 말, 아니 글의 가치를 되새긴다.

그녀는 늘 그녀이기에...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았던 그녀의 과거, 현재, 그리고 다르지 않을 미래.

그 모두를 응원한다.




마지막으로...

암은 우리다.

15년 지기 동네 친구가 작가님과 비슷한 시기에 유방암에 걸렸다. 갑상선암 완치 판정 직전에 받은 암 재발 선고였다.

애써 쾌활해하는 건지 본인 말대로 워낙 무딘 성격이라 담담한 건지, 그녀는 평소대로 밝았다.

머리를 밀고 가발을 맞추러 갔더니 사장님이 이렇게 이쁜 두상은 처음 본다고 했다는 말을 전하며 까르르 넘어가던 그녀를 위해 나를 비롯한 5인방은 평소처럼 구박했다.

평소처럼 그녀의 생일에 입원 중인 병원으로 쳐들어가 병원 로비에서 시끌벅적한 생일파티를 해주었다.

평소처럼 그녀가 쉬고 있는 요양병원을 깜짝 방문해 입원실에서 함께 뒹굴며 놀아주었다.

2주 요양병원에 있다가 1주일 집에 있을 땐, 심심하다는 그녀를 위해 좋아하는 화투를 치며 놀아주었다. 암 환우라고 봐주지도 않았다. 얄짤없이 피박을 씌웠다.


그렇게 3년 동안, 우리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고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하지 않은 채 놀아주기만 했다. 평소보다 더 호들갑 떨지도 않았고 더 잘해주지도 않았다. 우리가 없는 곳에서 그녀가 눈물을 쏟고 구토를 하며 힘들었을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모른 채로 살았다.


얼마 전 내 휴대폰 속 달력 5월 17일에 'OO 언니'라고 쓰여있는 걸 발견했다. 도저히 뭘 기념하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써넣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혼자서 끙끙 앓다가 물었더니 한참을 혼자 웃다가 말했다.


"너 기억 안 나니? 나 녹십자 임상 끝나는 날이라 돈 받는다고, 내가 한턱 쏘기로 했었잖아~ 그게 그날이야~"

그녀의 임상 끝나는 날 우리는 소고기 파티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평소처럼 화투를 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 이웃 작가님의 책을 읽고 후기를 쓰는 것이 처음이라, 너무 떨리고 힘들었습니다.

선물 주시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제 돈으로 직접 사서 읽었습니다. 숙제하듯 읽고 싶지 않아서 바쁜 일 다 끝내 놓고 여유롭게 펼쳤습니다. 그런데 후기를 쓰는 건 어찌나 힘들던지요... 행여나 저의 부족함으로 후기 곳곳에서 맘 상하지 않으실까 조심스럽지만... 응원하는 제 진심만은 전해지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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