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괜찮은 직원 한 명,열 알바 안 부럽다.
치킨가게 복기록
장사를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당연히 '돈'이었다. 높은 임대료, 들쑥 날쑥한 매출, 재료비와 관리비등의 고정지출,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르바이트생 주급과 주방 실장님 월급날.
인건비를 생각하면 아이들은 부모님이든 누구에게든 맡기고 부부 둘이서 몰입해 운영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소홀해지는 것은 용납이 안됐기 때문이었다. 부부 둘이서 운영하기에는 일손이 턱없이 부족한 규모이기도 했다. 바쁠 땐 주방에 최소 두 명은 있어야 했고 홀에도 최소 둘은 있어야 원활하게 돌아갔다. 그러니 손발 맞는 일 잘하는 직원이 함께하는 것은 장사를 하는데 꽤나 큰 복이었다.
가게를 오픈했던 첫겨울, 유난히도 바빴던 어느 날이었다. 아르바이트하던 한 학생이 자기 친구를 소개하기로 했고 열심히 닭을 튀기고 있었던, 한창 바쁜 시간에 '그 아이'가 면접을 보러 왔다. 워낙 정신없었지만 계속 기다리게 둘 수 없어 나와 남편은 홀 구석 빈 테이블에 앉아 그 아이를 마주했다. 잠깐의 면접을 끝낸 뒤 우리 부부는 주방 구석에 숨어버렸다. 대책 회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얌전하고 밝은 표정에 묻는 말에도 야무지게 대답했다. 신체 건강한 20대 초반의 여학생이었고 아르바이트 경험도 많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한눈에도 알아볼 정도의 구순구개열을 갖고 있었다. 주방 직원도 아니고 홀서빙을 구하는 사장으로서 심각하게 고민이 되는 지점이었고 쉽사리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기회를 주자. 저 친구는 우리한테 오기까지 수많은 거절을 당해왔을 텐데, 기회를 줘보지 않고 외모만 갖고 거절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요즘 말로 존멋...
그날 이후로 그 친구는 우리가 치킨집을 그만두기까지 3년여 동안 함께 일했다. 손님에게 친절하고 맡은 바 일에도 성실해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직원이었다. 최저시급이 4,500원에서 5,000원 사이였던 그 시절 8,000원까지 인상해줬지만 아깝지 않았다. 대학생이었던 그 친구는 우리 가게에서 번 돈으로 학비에 생활비까지 모두 감당했다. 집안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그 친구 어머니의 교육철학 때문이었다. 엄한 어머니 밑에서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자란 친구였다.
평생 열 번 정도의 구순구개열 수술을 받았다는 그 친구는 우리 가게에서 일하던 중에도 재건 수술을 한번 더 받았다. 그때를 빼고는 학교가 있는 춘천과 집이 있는 성남을 오가며 묵묵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을 잘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인성과 태도 역시 훌륭했다.
홀 직원으로 채용했지만 바쁠 때는 주방으로 뛰어들어와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었다. 손님들에게 늘 친절해서 그 친구를 이뻐하는 손님도 계셨고 팁을 주신 분도 계셨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함께 일하는 누구와도 잘 지내서 밝은 가게 분위기에 큰 도움이 됐다. 게다가 직원이 부족할때면 친동생, 친구, 동생의 친구까지 불러주었기 때문에 천군만마같은 직원이었다.
직원부터 손님까지 많은 사람들을 상대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의 얼굴을 이유로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값싼 동정을 내비칠 수 없었다. 그만큼의 깊이와 넓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픈 상처로 생긴 자격지심 때문에 무조건 굽신거리고 나서서 궂은일을 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았던 친구로 기억된다.
그랬던 그 친구가 7년 전 갑자기 아이 엄마가 되어 나타났다. 미혼모였다. 연락이 뜸해진지 반년만에 들은 소식이었다.
헤어진 남자 친구와의 재회에서 아이가 생겼으나 평소 생리가 불규칙했던 터라 임신을 의심하지 않았단다. 그저 계속 속이 안 좋아 약만 먹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날 만났던 날에도 실력 좋은 내과를 물었었다. 임신 5개월이 되었을 때 임신을 확인하고 남자 친구에게 이야기했으나 그는 그녀의 출산도, 결혼도 거부했다. 함께 중절 수술을 하려고 했으나 병원을 찾는 게 쉽지 않았고 결국 부모님들께 알리게 되었다. 대책을 논의하던 중, 임신 6개월 만에 조산을 했다. 760g의 작디작은 아이. 태어나자마자 폐와 심장에 문제가 있어 수술을 했다. 입양을 보내려 했으나 수술한 아기라 입양마저 거부당했다.
결국, 그 친구의 어머니는 어린 딸, 미혼모가 된 딸의 인생을 위해 중대 결심을 하셨다. 초등학교 교사를 퇴직하고 딸과 함께 고향인 춘천으로 내려가셨다. 손녀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당신이 경제활동을 책임지시겠다 하시며 구내매점을 인수, 운영하셨다. 덕분에 작고 약하게 태어났던 아기는 또래 아이들보다는 여전히 작았지만 밝고 예쁘게 자랐다.
딸아이가 다섯 살쯤 됐을 때 그 친구는 마카롱 집을 열었고, 춘천에서 꽤 유명한 집이 되었다. 육아도, 일도 열심히 하며 삶을 잘 꾸려가고 있다.
작년이던가, 생일을 맞은 그 친구에게 카톡 선물을 보냈다. 바로 답장이 왔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내내 궁금하던 걸 물었다.
"OO아~ 살면서 많은 편견, 선입견의 눈으로 널 바라보고 대하는 사람들, 분위기가 있었을 때, 넌 어떻게 극복했었니? 어떤 마음이라든지, 구체적인 방법이라든지..."
한참 뒤에 답이 왔다.
"음...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는 저를 보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할 것을 생각하니까 그게 더 힘들더라고요. 그렇게 상처 받은 마음으로 제 딸을 보면 딸에게도 좋은 영향을 못줄 거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행동하다 보니까 제가 먼저 숨기지 않고 당당해져야 다른 사람들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상처는 숨길수록 곪는다고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얘기하고 아무렇지 않아야 비로소 극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 친구다운 답변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는 사람이다. 잘 살아줘서 한없이 고맙고 행운을 빌게 되는 사람.
그런 인연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내 첫 장사는 성공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