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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10. 2021

Tit-for-Tat

"당신 팃포탯(Tit-for-Tat)이라고 들어봤어?" 

열심히 유튜브를 보던 남편이 물어왔습니다. 이 경우 십중팔구 새롭게 알게 된 이야기에 흥분하게 틀림없습니다. 

"팃포탯? 그게 뭐야?"

"게임 전략 이론이라는데, 난 이게 모든 갈등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전략이라고 봐."

"어떤 내용인데?"

"죄수의 딜레마 게임대회에서 죄수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 어떤 것인지를 실험해봤는데,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 팃포탯이었대. 상대가 한대로 갚아주는 맞대응 전략인데, 처음 시작은 무조건 협력으로 시작하는 거야. 두 번째 시행부터는 상대의 선택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거지. 상대가 협력하면 나도 협력하고 상대가 배반하면 나도 배반하고. 그러다가 상대가 협력하면 나도 다시 협력하는 거야. 점수는 양 팀이 모두 협력할 때 3점, 한쪽이 협력하고 한쪽은 배신할 때 협력한 사람은 0점, 배신한 사람은 5점, 양쪽이 모두 배신하면 1점을 주었대. 상대의 전략을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에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상대보다 높은 점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최종 점수에서는 최고 점수를 획득할 수 있다는 거야."


"그게 일상의 갈등을 없애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이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배신하면 바로 응징이 따르고 협력하면 반드시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었어. 결과적으로 모든 상대가 서로 협력하면 최고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거지. 남녀 간의 갈등, 보수와 진보의 갈등 모든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거야. 언제까지 손가락질하고 잘잘못을 따져서는 갈등 해소가 안돼. 누군가 갑자기 끝내야 해. 그냥 품어주어야 한다는 거지. 그래야 이 사회가 안정되고 발전될 수 있어. 그 방법 뿐이야."


"그게 가능할까? 너무 이상적인 이론 아니야?"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봐. 문재인 정부의 실패도 팃포탯을 못했기 때문이야. 극렬한 갈등을 배경으로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정권을 잡았을 때 상대 진영과 확실한 화해를 했어야지. 과거 정부들이 했던 것처럼 응징과 보복을 하지 말았어야 해. 정권을 잡자마자 과거 정권과 똑같이 자기 진영 사람들로 물갈이를 해버리고 전정권 사람들은 모두 몰아내버린 게 잘못이었어. 골고루 인재를 등용했더라면 이렇게 갈등이 심화가 되지 않았겠지. 결국 갈등과 대립을 기반으로 정권을 강화한 꼴이 돼버렸잖아. 그러니 모든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거 아니겠어?"


"정권을 잡으면 마음이 바뀌는 걸까? '나만 당할 수는 없다, 똑같이 갚아주고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드는 건가?"

"그러게 말이야... 이 악의 고리를 끊는 순간 서로에게 이득이라는 걸 알아야 할 텐데..."

"과연 그 고리를 끊을 정치가, 정당이 있을까? 기대가 안되는데?"


사회갈등이 극에 달한 이 상황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는 남편입니다. 현 정부에 거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진 사람이죠. 다음 대선에서는 이 갈등과 반목을 끊어줄 사람을 뽑겠다고 합니다. 그놈이 그놈인 정당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말입니다.



'탈리오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문구로 잘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의 '동해 복수주의'죠.  끝도 없이 반복되는 사적 복수의 고리를 국가가 같은 방식으로 처벌해 끊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해한 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처럼 탈리오 법칙은 응보적 정의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습니다. 인권과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법에 따라 하는 처벌이라지만 결국 법을 빙자한 살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형제도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사회 안전과 정의 실현을 목적으로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 법정 최고형을 선고하지만 범죄율을 감소시키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강조되는 것이 회복적 정의입니다. '치유와 화해'로 갈등을 다룬다는 것이죠.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폭력적 해결 방법을 지양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진심으로 화해와 용서를 이룰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공유 자원을 개인의 이익만을 생각해 남용한다면 결과적으로 모두가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죠. 이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자들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두 이론 모두 더불어 잘 살기 위해서는 용서하고 화해하고 협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당한 만큼 너도 당해봐라. 여태 얼마나 참고 살았는데. 쉽게 용서해주지 않겠다. 똑같이 당해봐야 내가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절대 상대의 이해를 받아낼 수 없고 평화로운 관계로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파국을 맞게 될 뿐이죠. 함께 하는 매 순간, 함께 숨 쉬는 모든 공간이 지옥이 될 뿐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당한 게 있고 억울한 마음도 있지만 널 용서하겠다. 내가 과거의 너와 똑같이 행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과거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훌훌 털고 같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한번 고민해보자.'

팃포탯 전략으로 회복적 정의를 실천한다면 공유지의 비극은 끊어낼 수 있겠죠. 

문제는, 먼저 손 내미는 자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 것인가 아닐까요? 아니, 과연 나타나기는 할까요?


상생과 협력을 위한 모든 전략은 결국 인간이 합리적이라는 전제하에 힘을 발휘합니다. 인간은,  무엇이 궁극적인 이익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갖춘 이성적인 존재라는 전제 말이죠. 

과연, 그럴까요? 

이 갈등의 끝에 '너 죽고 나 죽자!'가 있는 건 아닐지,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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