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소연

by 늘봄유정

아들의 학교에서 진로진학 전문가를 초청해 1:1 컨설팅을 해준다는 안내가 왔습니다. 신청서를 제출한 학생 중 50여 명을 선발해 학생부를 보고 맞춤 상담을 해준다는데, 일반고에서는 꽤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선발 기준은, 지금까지의 성적에 더해 학교에서 나눠준 신청서를 얼마나 성실하게 작성했느냐였습니다. 신청서에는 원하는 대학, 학과, 관심 있는 학문분야, 학교 활동 중 기억에 남는 것, 내 인생의 책 3권 등을 적는 것이었죠.


성적만 겨우 적어 넣은 아이는 원하는 학과 앞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엄마, 나 뭐 써야 하지?"

"그러게... 얼마 전까지는 건축학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싶어?"

"간절히 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공부하고 싶은 것, 흥미로운 것이 없는게 참 문제네... 답답하다 그치?"

"경제학과 가볼까?"


"좋아! 아빠는 경제학과 좋아."

방에 있던 남편이 뛰어나오며 호응을 했습니다.

"아빠는 OO이가 뭘 하든 재밌는 걸 했으면 좋겠고,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경제학과 가서 유학?"

"OO이랑 떨어지는 건 싫지만 넓은 세상에 나가서 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작은 아이 진로 찾기는 '경제학과'에 잠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또 언제 바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이 컨설팅 신청서는 솔직한 네 상태를 적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냥, 아직 희망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게 고민이라서 그걸 상담받고 싶다고 적어보는 건 어때?"

"그래야겠다..."

"주변에 비슷한 고민을 가진 친구들 많지 않아? 친구들하고 서로 얘기해보는 건 어때?"

"난, 친구들이랑 이런 얘기하는 거 싫어."

"왜?"
"왠지 하소연하는 것 같아서. 괜히 이런 얘기 꺼내면 좋았던 분위기 깨는 것 같아서 쫌 그래."

"근데, 친구란 하소연도 하고 고민도 얘기하는 그런 사이 아닌가? 좋은 얘기만 할 때보다 고민을 나눌 때 더 깊은 관계가 되기도 하고."

"글쎄...? 난 그냥 농담이나 하고 게임 얘기나 하고 싶은데?"


아이는 그래서 더 외로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민을 저 혼자 끌어안고 끙끙 앓고 있으니 말입니다. 또래 친구와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면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마저도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행동이라 생각하네요.

엄마처럼 친구들 붙잡고 할 말 못할 말 가리지도 않고 쏟아내지는 않아 다행입니다. 해놓고 괜히 말했다 후회할 때도 많으니까요. 허공에 뿌려지는 하소연일 때가 많은데, 해결되지도 않을 부정적인 말들이 상대를 얼마나 피곤하게 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들은 그런 게 싫었던 게죠...


아빠처럼 엄마한테라도 쏟아내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답을 구할 수는 없지만 어느 한 곳에 대고 쏟아내기라도 해야 덜 답답할테니까요.

물론 남편도 저에게 모든 괴로움을 쏟아내는 성격은 아닙니다. 혼자 만들어놓은 동굴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두 눈을 꼭 감은채 지진이 나는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가 많아 보입니다. 작은 아이도 남편의 그 모습을 닮았다는 게 마음이 아프네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생긴 대로 살아야지요.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게 싫다면 꿋꿋이 혼자 감내하며 버티고 길을 찾아야겠죠.

다만,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랜 시간 외롭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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