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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n 29. 2021

꿈 없이 살아도 된다는 것.

무늬가 화려한 냉장고 바지, 흰색 슬리퍼, 멀리서 봐도 도드라지는 색으로 칠한 엄지발가락, 삐딱하게 쓴 모자, 목이 늘어난 티셔츠.

교육자원봉사 컨설팅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한 그는 대회의실 저쪽 끝에 있는 문에서 회의가 열리는 곳까지 한치의 서두름도 없이 평온한 속도로 슬리퍼를 찍찍 끌며 나타났다. 코 밑으로 살짝 내려온 마스크 안쪽으로는 덥수룩한 콧수염이 보였다. 모자 밖으로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짝 자른 헤어스타일이 짐작됐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수가방을 들고 있었다고 상상해도 무리가 없을 차림이었다. 컨설팅 자료에 올라온 그의 이름 옆에는 '학부모'라고 적혀있었다.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초등학생 학부모인가?'


회의 중 들어온 낯선 이에게 나의 온 신경이 집중됐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도 시종일관 다리를 떨었고 불만이 있는 건지 관심조차 없는 건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등장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니다. 내 신경에 거슬렸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 게다.


우리는 하던 회의를 계속했다. 그 지역 교육자원봉사센터의 현황, 예를 들어 봉사 인력풀 수와 조직된 봉사단 종류, 매칭 실적 등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현재 진행하고 있는 봉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들었다. 운영지원단이자 봉사자로 두 분이 참석하셨는데, 30분 늦었던 분이 그중 한 분이었다. 당최 그는 어떤 봉사를 어떻게 하고 있는 사람인지 궁금증 반 의구심 반이었다.


해당 지역은 올 초 겨울방학 때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습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대학생을 비롯한 봉사자들이 멘토가 되어 중학생들에게 국, 영, 수 과목 학습을 도와주었다. 교육지원청에서 교재를 준비해주었고 학생 두 명에 멘토 한 명이 짝을 이루어 일주일에 세 번씩 총 16회에 걸쳐 줌으로 교육자원봉사를 했다. 꽤 괜찮은 프로그램 같았다. 코로나로 학생 간 교육의 격차가 커진 시점에 적절한 도움이겠구나 싶었다.


그때였다. 슬리퍼 신은 발을 까딱거리며  손깍지를 끼고 앉아 굉장히 산만한 태도로 앉아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위해 주무관님부터 시작해 교육지원청에서 많은 신경을 쓰신 건 알겠는데요,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공교육에서 배우는 국, 영, 수를 과외처럼 해주는 게 교육자원봉사는 아니잖아요. 교육청에서 준비한 교재, 전 안 썼습니다. 대신 고전 읽기를 했어요. 함께 고전을 읽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온라인 클래스 하면서 아이들이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고민을 들어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게 훨씬 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요, 제가 보기보다는 가방끈이 길어요. 그래서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그러는데요, 우리 모두 이제는 알잖아요. 그런 거 세상 사는데 큰 의미 없다는 걸요.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국, 영, 수가 아니에요."

회의장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육자원봉사의 내용과 방향에 대한 그의 시각이 맘에 들었다.


"전 명상을 가르치고 명상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걸 알릴 길이 없어서 교육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된 겁니다. 오랜 시간 집중을 하지 못하는 초등학생들에게는 걷기 명상을 하면 되고요 움직이기 싫어하는 고등학생들을 위한 나름의 명상법이 다 있거든요. 아이들이 명상을 하고 나면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그런 거 해주는 게 교육자원봉사 아닙니까?"


"그리고 전요, 제발 학교와 교육청에서 꿈 좀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자유학기제다 뭐다 해서 꿈을 찾아라 하는데, 꿈이 없으면 좀 어떻습니까? 꿈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꿈을 못 찾거나 이루지 못하면 좌절하게 만드는 게, 이게 교육입니까? 교육자원봉사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영수 못해도, 꿈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잘 살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것 말입니다."


숙연해졌다.

꿈을 강요하는 사회, 국영수 성적으로 꿈의 크기와 높이가 달라지는 사회,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사회다.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사회인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전락해버린 학교... 그러니 교육자원봉사는 학교가 해주지 못했던 것을 해주는 것이 맞다. 꿈을 찾고 싶다면 찾게 도와주고, 꿈이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음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입니다."

계속되는 그의 이야기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

"저는 무자입니다."

"네? 무자요?"

"자식이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제 이름 옆에 '학부모'라고 써 놓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진지한 이야기에 한껏 가라앉았던 좌중은 그의 한마디에 웃음을 터뜨렸다.



회의 시간에 늦은 것이나 마지못해 들어오는 듯했던 그의 걸음걸이, 방금 자다가 일어나 끌려 나온 것 같은 행색, 회의시간 내내 휴대폰을 만지던 태도가 나는 여전히 못마땅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사회, 교육, 학교의 문제에는 공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자원봉사만큼은 그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말에도 동의한다. 그리고 어쩌면, 내 경직된 사고로는 그의 태도를 이해하는 게 힘들었지만,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생각과 모습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자원봉사센터에는...

자식이 없어도 교육자원봉사를 하면서 아이들이 명상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교육자원봉사를 통해 교육의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봉사를 통해 자신의 성장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저렇게 살 수도 있으며 어떻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느끼기를 바란다.


그깟 성적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기를...

그런 것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귀한 존재임을 잊지 말기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툴툴 털어버리면 그만이고, 넘어진 김에 쉬어도 그만인 게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와 함께 배워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보는...

나는 교자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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