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스로를 꼼꼼하고 열정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살이에 안일한 편이며 대충대충 빨리빨리 해버리고 쉬자는 타입이었다.
집에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 만나서 차 마시고 저 사람 만나서 밥 먹는 시간이 제일 아까웠다.
무엇이든 끈기 있게 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엄마는 그게 이마에 있는 수두자국 때문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든 중간에 흥미를 잃어 그만두어도 핑계가 됐다. '망할 놈의 곰보자국 때문에...'라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변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변화를 학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손원평 작가의 < 아몬드 >에서 감정에 무감각한 주인공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도움으로 적재적소에 필요한 감정을 학습하는 것처럼. 나 역시 마음 깊은 곳에서 동하지는 않았지만 디베이트 코치로, 봉사자로, 글 쓰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나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고 학습했으며 행동으로 옮겼다. 그렇게 변했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변화는 학습에서 오는 것 아닐까. 감정이라는 것도 숱한 상황을 반복해서 경험하며 경우에 따른 처신, 반응을 학습해 얻은 결과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와 교육자원봉사는 나의 변화를 이끌어낸 학습의 장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둘을 만난 것은 2019년이었다.
무뚝뚝하고 냉정했던 내가 교육자원봉사센터 월례회에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난다. 봉사자 선생님들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티 없는 웃음을 보내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언제 봤다고...'라며 뾰족한 마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그들처럼 환하게 웃으며 안부를 묻는다. 닭살스러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던 말들을 하고 있다. '여자끼리 팔짱 끼는 거 딱 질색이야!'라고 생각했는데 오는 팔 안 막는 정도까지는 진도가 나갔다.
디베이트 교육자원봉사를 하면서 내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디베이트 주제가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선생님~ 선생님~' 부르며 온갖 정을 전하는 아이, 화난 듯 앉아 있는 아이, 쉴 새 없이 떠드는 아이, 전혀 입을 떼지 못하는 아이까지... 그들과 교감하고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게 내 역할이었으니 꼼꼼하게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했고 정을 나누어 마음이 움직이도록 도와야 했다. 그러니 그들의 입안문과 논리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보다는 BTS 이야기를 들어주고 엄마한테 혼난 이야기에 열정적으로 귀 기울여 주어야 했다.
그저 내 안의 것을 끄집어내고 싶고 쓰는 행위가 좋아서 시작한 글쓰기였다. 하지만 쓸거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펴야 했고 읽는 이를 생각해서 다듬어야 했다. 차츰 늘어나는 이웃 작가님들의 글을 읽게 됐으며 '세상은 넓고 빼어난 작가는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작가님들의 출간 소식에 기뻐하고 책을 주문하고 있다.
내 삶에 동시에 들어온 글쓰기와 교육자원봉사는 닮은 구석이 많다. 언젠가 '삶의 촉수'작가님께서 '왠지 봉사와 글쓰기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머릿속에 수많은 공통점이 떠올랐다.
첫째,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글쓰기도 교육자원봉사도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고 재미있고 의미 있어서 계속하고 있는 일이다. 우연한 기회에 만났지만 그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쪽이다.
둘째, 의무감이 장난 아니다.
누가 매일 글 쓰면 돈 준다고 한 적 없다. 누가 봉사하면 떼돈을 벌게 해준다고 한 적 없다. 그런데 쓰고 있고 봉사를 하고 있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냥'이라고 답할 테다. 이유 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이유 없이 그만둘 수도 있겠지만, 이유가 없기 때문에 실컷 사랑할 수 있다. 거의 스토킹 하는 수준으로 열정을 다하고 있다. 이유와 조건 없는 사랑이 무서운 이유다.
셋째, 다른 인연을 맺어준다.
글쓰기를 하면서 이웃 작가님들과의 교감이 늘어났다. 어떤 분은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른다. 나이도 모르고 사시는 곳도 모른다. 그런데 서로 반갑다고 난리다. '나도 나도'라며 맞장구쳐준다. 내 책은 못 내고 있지만 이웃 작가님의 출간 소식은 마냥 반갑다. 무뚝뚝한 내가 한껏 똥꼬 발랄해지는 곳이다.
교육자원봉사를 하면서 함께 봉사하는 선생님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 모든 인연에 의미가 생겼다. 함께하면 즐겁고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스쳐가는 인연을 시답잖게 생각하던 내가 스치는 인연 모두를 귀히 여기게 됐다.
넷째, 참 좋은데 누구한테 권할 수가 없다.
글을 쓰며 얻는 것이 많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될 수 있다. 타인에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것이 주는 책임감도 즐기게 되고 소통에서 오는 즐거움도 있다.
교육자원봉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진 것으로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아이들의 작은 변화를 보며 느끼는 성취감이 크다.
글쓰기와 교육자원봉사를 하면서 내가 느낀 행복은 이루 표현하기 힘들다.
그런데 '글을 써보세요~' '교육자원봉사를 해보세요~'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는 않는다.
그 둘이 가진 중압감 또한 크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의 무게, 말보다 더 오래 흔적을 남기는 글에 대한 책임감이 때로는 버겁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미칠 영향력을 생각하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조심스럽다. 참 좋은데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참 좋은데 함께 하자고 끌어당기기가 힘들다.
'끝까지 끈기 있게'의 기준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 분야의 최고봉에 오르고 큰돈을 벌어 성공을 해야만 끝까지 끈기 있게 했다고 평가해줄 주변인들. 그들 앞에서 난 늘 끈기 있는 사람이 못됐다. 그래서 늘 위축됐다. 그 기준에 따르면 난 늘 중도 포기자요 실패자가 분명했으니까.
이제 나만의 기준을 정하기로 했다.
'끝'이란, 내가 더 이상 하고 싶어지지 않을 때, 더 이상의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로 정의한다.
'끈기 있게'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이유 없이 그저 좋아서 열정을 갖고 꾸준히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렇다면 난 끝까지 끈기 있는 사람이 된다. 내가 하고 싶을 때까지, 재미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될 때까지 글쓰기와 교육자원봉사를 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브런치에 새로 생겼다는 글쓰기 알람 기능을 설정하지 않아도 글을 쓸 것이며 돈 한 푼 벌지 않아도 교육자원봉사를 할 것이다. 이유 없이, 조건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