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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07. 2021

나의 음주는 정당했다.

야심한 밤. 

모두가 잠든 12시 30분에 맥주를 꺼냈다. 남편이 먹다가 반쯤 남겨 놓은 소주도 챙겼다. 안주는... 굴러다니던 치즈 조각과 반찬으로 먹던 쥐포채무침을 꺼냈다. 잘근잘근 씹기에는 제격이다. 


그냥 자려고 했다. 애초에 술을 먹을 생각도 없었다. 간헐적 단식 좀 해보겠다고 저녁도 거른 나였다. 하지만 알코올이 급했다. 맥주에  소주를 섞은 것도 그 이유다. 절대 술이 좋아서나 안주를 탐해서가 아니라 취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그치? 너 이 밤에 뭐 먹고 그런 애 아니잖아? 진짜 짜증 나고 어쩌지 못해 그러는 거잖아?"

혼자 식탁에 앉아 일단 나를 설득한 후에야 빈 잔에 술을 채웠다. 


한 시간 전 단톡방에 올라온 어떤 이의 문자가 발단이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2학기 봉사에 참여할 수 없겠다는 우리 팀 봉사자의 문자였다. 그간 여러 번 받아왔던 문자였고 마음도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참아지지가 않았다. 


참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것이 답답했다. 이해하지 않으면 뭘 어쩌겠는가. 한낮 봉사에 불과한 것을.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고, 나와 내 가정이 바로서야 봉사든 나눔이든 가능하다는 것도 다 안다. 그래서 이해한다. 각자의 사정을. 

하지만 전날 만났을 때 그분이 그 말만 안 하셨어도 덜 서운했을 것 같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세요?"


그 말은, 듣는 순간에도 기분 나빴지만 집에 와서도 계속 신경 쓰이는 말이었다. 계속 질문이 따라다녔다.

부귀영화?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으며 귀하게 되어서 몸이 세상에 드러나고 이름이 빛남.

정의를 찾아보고 나니, 난 부귀영화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봉사를 통해 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귀한 대접을 받기를 원했나 보다. 봉사해서 돈 버는 일도 연결되고 봉사 이력을 안고서 높은 지위에도 올라가 보고 결국은 세상에 내 이름 석자 알리고 싶었는지도... 

그러기에는 그분의 질문 안에서 이미 답이 드러난 게 '봉사'다. 부귀영화에 다다르기에는 참 보잘것없어 보이는 행위이다. 적어도 그분이 생각하기에는... 


열과 성?

열렬함과 정성. 

내가 열과 성을 다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봉사를 할 때 가져와 쓰는 아이들의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를 따라주는 우리 팀의 봉사자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다. 

내 모든 정성이 하늘에 닿아 복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과 성을 다한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러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봉사가 이렇게 자괴감 느끼면서까지 할 일인가 싶어서 한 모금..

이거라도 안 하면 뭐하나 싶어서 한 모금..

봉사가 아니어도 난 나를 볶으며 살 팔자인걸 알아서 한 모금..

다 그만두고 취직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서 한 모금..

내 울적함의 이유와는 아무 상관없는 군대 간 아들이 보고 싶어 한 모금..

갑자기 신세가 처량해서 또 한 모금.. 


봉사가 이럴 일인가...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전해준다는 마음 하나만으로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었구나 싶었다. 

봉사의 이유와 목적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드러내고 확인받아야 하는 일. 

왔다 갔다 하는 이들을 붙잡을 수도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으며 가버린 이의 몫까지 내가 고스란히 짊어져도 그러려니 해야 하는 일...



하필 이 타이밍에 봐버린 영상 하나가 날 다시 다독였다.

< 스트릿 우먼 파이터 >라는 프로그램에서 '원트'의 리더인 효진초이가 연습과정에서 힘들었던 것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과 이 미션에 나만 욕심이 있나? 나만 이 순간들이 소중한가?'라고 생각했다며 섭섭함을 드러냈다. 

힘들지만 팀원들에게 티를 낼 수 없었다고 했다. 자기 기분이 팀 분위기를 물들어버릴까 봐서. 

매일매일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마지막 남은 책임감'이라 했다. 


책임감. 

봉사에는 책임이 따른다. 

봉사 수요자들이 원하는 것을 준비해줘야 한다는 책임과 더불어 함께 하는 봉사자들이 의미와 보람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책임. 

노트북을 켜고 봉사 스케줄 파일을 열었다. 

그분이 봉사하기로 한 학교와 시간에서 그분 이름을 지우고 빈칸을 내 이름으로 모두 채워 넣었다. 

'그래 봐야 16시간 더 늘어나는 것뿐이다. 11월 한 달만 고생하면 된다. 그뿐이다...'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며 다 털어버린...

나는 교자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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