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라이벌

by 늘봄유정

얼마 전, 작은 아이의 중간고사가 있었습니다.

평소 공부의 근원적 이유에 대한 고민이 깊어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가 많은 아이인데 신기하게도 시험 기간 동안에는 표정이 밝습니다. 시험을 잘 보고 못 보고에 관계없이 약간 흥분한 상태가 된다고나 할까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녀석입니다.


시험 첫날, 중국어 시험을 보고 온 아이는 오자마자 수다가 터졌습니다.


"엄마! 나 중국어 아주 어이없는 거 하나 틀렸다?"

"어떤 건데?"

"보기에 사진 한 장이 나오고 밑에 한글로 설명이 쓰여있었어. 무엇에 대한 사진과 설명인지를 고르는 단답형 문제였거든? 거저 주는 문제였는데, 설명을 안 읽고 사진만 보고 푼 거 있지.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 그리는 여가 활동인데 요요하는 걸로 봤어. 전교생 중에 그거 틀린 애는 나밖에 없을 것 같아... 오늘따라 중국어가 한국어처럼 술술 읽힌다 싶었는데, 하필 제일 쉬운 문제를 틀려버렸어. 아! 자존심 상해!"

"하하하. 황당했겠네. 어디 문제 한번 봐봐. 그러네~ 딱 봐도 땅바닥에 긴 장대로 글씨 쓰는 건데, 이걸 어떻게 요요로 봤어? 설명도 친절하게 글씨 쓰는 거라고 나오는구만."

"그러니깐... 그래도 OO 이보다는 잘 봤다? 걔는 엄청 많이 틀렸대."
"중학교 때 중국 유학 갔다 온 OO이?"

"응. 중국어를 잘 못해서 다시 왔다더니 진짜인가 봐."


"너한테 중국어 라이벌은 OO이야? ㅎㅎ"

"그럼~ 중국 유학 갔다 온 애잖아~"

"너, 너무 웃긴다~~ 남한테는 관심도 없는 줄 알았더니? 그럼 다른 과목은? 과목마다 라이벌이 다 있는 거야?"

"그건 아니지."

"왜? 왜 다른 과목은 라이벌이 없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 자신이 라이벌이니까. ㅋㅋ"

"올~~~ 멋진데?"


"하지만 수학은 나 자신도 라이벌이 될 수 없지."

"왜?"

"수학에 있어서만큼은,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더 똑똑해져 있을 거거든...음하하하~~"

"푸하하 하하하하.... 재수 없어~~~~ 그런데 기가 막힌 명언이다~~"

"농담이야~ 농담~ 진짜 농담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면 안 돼?"


아이는,

입시 지옥에서 허우적 대는 듯 아프게만 보였던 아이는,

불합리한 입시 제도에 분노하지만 미약한 자신의 힘과 무력한 어른들로 인해 좌절하는 아이는,

가끔씩 이렇게 180도 다른 모습을 펼쳐놓습니다.


어이없는 걸 틀려놓고도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아이라 다행이다 싶습니다.

다른 어떤 이가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라이벌로 생각한다는 것 또한 기특합니다.

몇 개씩 틀린 과목에 대해 "실수야 실수~ "라며 스스로에게 관대할 수 있는 아이를 보면 저도 관대한 학부모가 됩니다.


남들 모두 맞은 문제는 아이도 당연히 맞고, 실수 하나 없이 모든 과목 좋은 성적을 받았다면 기뻤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는 괜찮습니다.

시험 기간, 다크 서클은 발등까지 내려오고 세상 끝난 듯한 표정을 짓는 아이 대신, 컨디션 조절한다며 10시면 잠자리에 들고 말간 얼굴로 기분 좋게 등교하는 아이라서 감사합니다.

과정부터 결과까지 본인의 몫임을 알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나를 들여다보는 아이라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위해 때로는 늦은 밤까지 깨어있는 아이라서,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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