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펑'소리와 함께 주방 환풍기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관리사무소에 AS를 문의하니 너무 오래된 제품이라 부품도 없고 AS도 힘드니 새것을 구입하는 게 나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지요.
16년째 살고 있는 이 아파트에 새것을 들인다는 것은 꽤 어색합니다. 무릎이 튀어나온 회색 트레이닝 바지에 명품 뾰족구두를 신은 것 같달까요. 그러니 최대한 싼 주방 후드를 사야 했습니다. 자칫하면 후드를 달다가 싱크장이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기사님이 설치까지 해주는데도 6만 원이 채 안 되는 모델이 있더군요. 남편은 그 돈도 아깝다고 했습니다. 유튜브를 보니 본인도 얼마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죠. 그래서 기사님 출장비 2만 원이 빠지는 비용을 지불하고 후드를 주문했습니다.
총알배송으로 주방 후드가 도착하던 날, 대형마트에 가서 79,900원짜리 몰트 위스키 한 병을 샀습니다.
한번 먹었다 하면 한병 이상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소주 대신 이제부터 반주는 위스키 딱 한잔으로 마무리하겠다는 남편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남편에게 선물을 전하니 입이 찢어지더군요. 자기를 위해 십원 한 장 쓰는 것도 아까워하는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순순히,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었습니다.
위스키 한잔을 기분 좋게 마신 남편은 목장갑을 끼고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취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한 것 말입니다.
기존에 달려있던 후드를 뜯어 내는 것부터 보통 일이 아니었죠.
'우리 집에는 제대로 된 공구가 없다', '이건 유튜브에서 안 가르쳐줬다', '이런 재료가 필요할 것 같다'는 작업 지연의 이유들이 쌓여갔고, 박스를 벗어나지 못한 새 후드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거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제 속엣말도 생성됐습니다.
- 도대체 언제 달아주려는 건지...
- 59,000원이었으면 기사님이 와서 기존 제품 철거와 새 제품 설치까지 단번에 마쳤을 텐데...
- 지금까지 산 공구와 재료 가격이 이미 2만 원 가까이 된 것 같은데...
- 이러다가 가스레인지에서 나온 이산화탄소, 음식 조리 시에 나오는 각종 유해한 것들을 내가 다 마시게 생겼는데...
- 위스키부터 덜컥 안겨주는 게 아니었는데...
신기하게도 유독 남편에게만은 속엣말이 바로바로 겉엣말로 나왔습니다. 특히 반주로 위스키를 따를 때마다 "와! 저 먹튀 보소! 술만 받고 작업은 중단하다니!"라며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럼 남편은 무안해하지도 않고 "조금만 기다려봐~ 다 계획이 있어~ 그때까지만 생선이랑 삼겹살 굽지 마~"라며 능청스럽게 또 하루를 넘겼죠.
그런데 어제는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짜증이 가득한 얼굴에 어깨를 잔뜩 늘어뜨리고는 들어왔습니다. 후드의 '후'자도 꺼내지 못했죠. 남편은 매일 먹던 위스키도 먹지 않더군요.
- "짜증 나는 일들을 일일이 어떻게 다 말해주겠어?"라고 쏘아붙이는 거 보니, 이래저래 피곤한가 보네...
-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지...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는 거지...
- 오늘은 아무 말 걸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겠다...
어제는 속엣말을 모두 꿀꺽 삼키며 일찌감치 잠들었습니다.
점심이 가까워오니 기름 쩐내가 집에 퍼집니다. 누구네 집에서 전이라도 지지나 봅니다.
주방 후드의 부재는, 우리 집 요리 냄새뿐 아니라 밑에 있는 19 개집의 주방 냄새를 몽땅 우리 집에 채워놓고 있습니다. 아마도 연결이 되어있는지, 뚫린 후드 구멍으로 각종 냄새가 들어옵니다.
위스키는 다 떨어져 가는데 여전히 후드 자리는 휑합니다.
- 설마, 어제저녁 그렇게 침울해했던 게... 후드를 못 다는 핑계가 다 떨어져서 연기한 건 아니겠지?
이유가 어찌 됐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두 번째 위스키를 사러 나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