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줄곧 새 종이를 내놓으라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손끝으로 프린터기 급지함을 가리키며 "으어어~"라며 자신만의 언어로 답답함을 표현했다. 그럴 때마다 반 아이들은 돌아가며 한 명씩 나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자리로 돌려보냈다. 보통은 담임선생님이나 도움반 선생님이 함께 하시며 도움을 주시는데, 그 반은 아이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배로 정신없던 수업이었다.
PPT를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와중에 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급지함의 종이가 바닥날 때까지 한 장씩 야금야금 꺼내 주며 아이를 제자리로 돌려보내야 했다. 겨우 네 번 만나는 교육기부자가 담임선생님 자리에 있는 A4 용지를 함부로 써야 할 정도로, 난 절박했다.
"OO아. 종이 그만~ 이미 많이 있잖아. 여기 뒷장에다가 그림 그려."
"선생님~ OO 이는 원래 그래요. 그냥 수업하시면 돼요~"
1,2교시 블록 수업으로 70분이 흐르는 동안(코로나19로 시정표가 달라졌다.) 반 아이들은 익숙한 듯 시종일관 배려심을 잃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런 광경을 처음 보는 내게는 혼란 그 자체였지만 아이들에게는 그게 질서였다. 그날만큼은 내가 생각해놓은 plot에 맞춰 수업을 진행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진행에 내가 올라타야 했다. 다시금 교육자원봉사로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던 시간이었다.
교육자원봉사를 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디베이트'를 통해 나와 우리,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끊임없는 의문과 질문을 갖도록 '단 한 번의 경험'을 시켜주고자 함이다. 다양한 토론 기법 모두가 유용하지만 내가 아는 게 디베이트이니 그걸 갖고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며, 지속적으로 오래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학교 수업에서 그 정도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개인수업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것들의 10%도 구현 못하기 때문에 늘 아쉬움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어떤 아이는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어떤 아이는 영감을 얻을 것이라 믿는다. 그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과연, 그 믿음이 맞을까.
얼마 전 2년간 진행하던 팀 수업을 마무리했는데, 한 학생이 우편함에 편지를 넣어두고 갔다.
아이는 편지에서 나와 함께 한 수업을 통해 자신이 많이 성장했음을 들려주었다. 내가 이런 말을 들어도 되나 싶을 만큼 벅찬 말들로 가득한 편지를 읽으며 감동이 밀려옴과 동시에, 교육자원봉사를 통해 만난 아이들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았을 것인가가 궁금해졌다.
수업 내내 종이를 달라고 떼를 쓰던 아이에게 나는 그저 '종이를 잘 주었던 사람'으로만 기억되지 않을까.
같은 수업을 들었던 반 아이들에게 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종이를 주었던 선생님'으로만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아이에게는 이 수업이 딱딱하고 지루한 수업에 불과할 테고 어떤 아이에게는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게 죽도록 싫을 수도 있을 텐데... '디베이트가 재미있었어요.' '좋았어요.' '또 하고 싶어요'라는 말에 도취되어 '난 언제나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다'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아니,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 존재, 수업'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힌 건 아닐까.
단 한 명의 아이에게라도 의미 있었다면 되는 걸까.
종이를 달라고 애쓰던 도움반 아이에게까지도 의미 있는 수업이 될 수는 없었던 걸까.
교육자원봉사를 하면 할수록 고민만 많아지는...
나는 교자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