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는 밴드가 있습니다.
기타, 드럼을 치는 그 밴드는 아니고요, 아이들이 다닌 고등학교의 학부모 밴드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와는 달리 고등학교 학부모들은 학교의 문턱을 높게 느낍니다. 적극적으로 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는 합니다. 궁금한 게 많다고 해도 알아볼 경로는 마땅치 않습니다. 학부모들 모임도 별로 없고 학교에 직접 연락하는 건 선뜻 용기가 나지 않죠.
그래서 밴드를 개설했습니다.
주로 학교 홈페이지를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내용들을 전하거나, 긴급히 학부모들에게 전할 내용이 있을 때 제가 글을 올립니다. 학부모들은, 개인 채팅을 통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시거나 건의사항을 말씀해주시죠. 요즘 들어 조금 활성화되어서 학부모님들 간에 묻고 답하는 모습이 간간히 보입니다. 긍정적인 변화, 발전입니다.
밴드를 가입하고자 하시는 학부모는 간단한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아이가 몇 학년이신지요?"
답은 1,2,3 중 하나입니다. 단순하고 뻔한 질문에 그보다 더 간단한 답이죠.
각종 광고를 올리기 위해 가입하는 사람들이 많아 넣은 장치입니다.
그런데, 이 장치를 통과하고 싶었는지, 답을 남기는 스팸꾼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의아한 것은 이 간단한 질문에 엉뚱하고도 장황한 답을 늘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질문 따위는 상관없이 정해진 답을 입력하게 프로그래밍된 기계가 하는 일이겠지만, 답이 너무 생뚱맞아 실소를 하게 됩니다. 맞춤법을 틀리는 것 보면, 중국 어디쯤에서 작성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아이가 몇 학년이신지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경기 사는 사람입니다. 소문으로 좋다고 가입합니다. 승인 바탁드려요."
"아이가 몇 학년이신지요?"
"서울 살고 잇는 매너 있는 사람입니다. 서로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가입 승인해주세요."
"아이가 몇 학년이신지요?"
"좋은 인연 찾고 잇어요. 서로 고민 상담 편하게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친구 찾아요."
< 속엣말 리스트 >
- 아니 '서울 사는 매너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요즘 누가 쓰지? 표준어를 정의할 때 쓰던 말 아닌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 느낌인데?
- 우리 밴드가 언제 그렇게 좋다고 소문이 다 났지?
- 좋은 인연, 고민상담, 커피 한잔... 왜 우리 밴드에서 찾지... 지방 고등학교 학부모 밴드일 뿐인데... 글 올리는 사람은 기껏 나뿐인데... 그렇게 외로운가?
- 맞춤법은 그렇다 쳐도 질문이 요구하는 정답에 대해 고민하는 성의라도 보일 것이지...
가입 승인을 간절히 기다리는 문구를 한심스럽게 한참 쳐다보다가 저는 속엣말을 한꺼번에 응축해 한마디 날립니다.
"가입 거절"
부디, 서울 사는 매너 있는 그 분이 상처 받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