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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Nov 27. 2021

재주가 많은데 참 아깝다.

얼마 전 큰아이의 첫 면회를 가던 길이었습니다. 

첫 손주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친정어머니도 동행을 하셨죠. 어머니는 왕복 9시간의 대장정 동안 쉴 틈 없이 떠드셨습니다. 평소 한마디도 안 하고 지내는 날도 있다시며 떠들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좋다던 어머니는 1년 치 수다를 하루에 다 쏟아부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던지신 한마디가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너 연이 아줌마 알지? 그 아줌마가 그러더라. 유정이는 참 재주가 많은데 아깝다고~"
"뭐가 아까워요?"
"재주가 많은데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아깝다는 거지~"

어머니의 이 말은 이미 수십 차례 들었던 말입니다. 재주가 많은데 돈도 안 벌고 노는 게 아깝다는 어머니 지인의 말이었죠. 언뜻 보면 좋은 말 같았지만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존감이 확 꺾이는 말이었습니다. 

'아무리 바쁜 척해봐야 제대로 된 수입이 없다면 넌 실패자다!'

'왜 하나를 하면 끝장을 볼 때까지(돈을 잘 벌 때까지) 해내지를 못하냐!'

'대학원도 나오고 자격증도 이것저것 땄지만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게 창피하다!'

라고 말하고 싶은 어머니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제가 살아오며 행한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했습니다. 어떤 말을 해야 어머니가 더 이상 이 말을 하지 않을까 고민하면서요. 그러면서 쌓아온 속엣말이 이렇게 많았습니다. 쌓이면 쌓일수록 더 독한 말들로 진화를 하더군요. 그 말들에 제 마음이 더 이상 오염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몇 개는 털어내어야 할 필요를 느낀 거죠.

< 속엣말 리스트 >
* 재주가 많은데 참 아깝다는 그분의 말은 결국 저에게 재주가 없다는 말을 돌려서 한 거예요. 돈 버는 재주로 못 이어졌으니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라고요.
* 연이 아줌마는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그 말을 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어머니가 매번 그 말을 나한테 하는 거예요?
* 그 얘기를 들으면 제가 기분 나쁠 거라는 건 생각 못하세요? 
* 죄송해요. 어디 가서 당당히 자랑할만한 자식이 못 되는 게... 그것밖에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 꼭 돈을 많이 벌어야 아깝지 않은 사람인 건가요? 
* 제가 왜 아무것도 안 해요? 나름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데요. 아이들 키우는 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자제하거나 포기한 것들은 또 얼마나 많고요. 
* 같은 여자이면서 엄마이자 아내, 주부로 살아가는 제 삶의 가치를 그렇게 밟으시는 건 너무 속상하네요. 
* 전 제가 재주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재주가 많다면서 또 동시에 안타깝다고 하는 평가가 불편하네요.
* 저도 성공하고 싶어요. 무엇으로 이름을 날리든 돈을 많이 벌든 하고 싶다구요. 맘대로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제가 던진 말에 어머니가 상처를 받거나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건 원치 않지만 딸이 그 말을 참 싫어한다는 표현은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싱글 생글 웃으며 리스트 중 하나를 꺼내 말했습니다.

"엄마~  그 얘기는, 내가 결국 재주가 없다는 말을 돌려서 한 거예요. 어쩜 그렇게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냐는 말이라구요."

엄마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습니다. 

"그래? 그런 말이야?"라고 끝을 흐리며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전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말에서 해방이 되었구나 싶었죠.


방심했습니다. 

이제는 끝이다 생각한 제가 어리석었죠.

며칠 전 친정 김장날, 어머니는 그 말을 또 하고 마셨습니다.

"유정이 김치 속 잘 넣네~"

딱 요기까지만 하고 마른침 좀 삼키시면 좋았을 것을...

"연이 아줌마가 그랬지... 재주가 많은데 아깝다고."

기어이 그 말까지 이어진 엄마에게 이번에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난 그 말이 너무너무 싫다고. 하지만 정색을 하며 화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엄마, 화나면 답 없거든요... 

속 좋은 사람처럼 깔깔깔 웃으며 두 번째 속엣말을 꺼냈습니다.

"연이 아줌마는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그 말을 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어머니가 매번 그 말을 나한테 하는 거예요?"

"어? 응? 아... 그냥 뭐... 아까우니까 그런 거지..."

어머니는 얼버무리며 부엌으로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예스 예스 예스! 송유정 잘했어! 이 정도면 더는 저 말을 안 하겠지?'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혹자는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뭐 그리 기분 나쁠 말이냐고.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괜히 그런 말에 발끈하는 거라고 말이죠. 

네. 맞습니다. 

전 자존감이 낮아요. 그래서 정신없이 절 혹사시키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속엣말을 뱉으면 미움을 받을까 봐 꾹꾹 참는 것도 자존감이 낮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조금씩 꺼내 보려 합니다. 

이불킥 하며 만들었던 속엣말 리스트들 중 가장 적절한 것을 찾아 써먹으며 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우는 작업을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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