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된 큰 아이가 옆으로 쫙 찢어져 꼬리가 올라간 눈을 해서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는 게 일상이 되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한참 제주도 한 달 살기가 유행이었던 터라 나도 여름방학 동안 아이들과 셋이서 한 달 살기를 해볼까 잔뜩 꿈을 꿨다. 이루기 힘든 꿈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하고 싶다는 일에 늘 OK를 했던 남편이니 제안하면 바로 수락할 줄 알았던 것.
"나도 이번 여름 방학 때 아이들 데리고 제주도에서 한 달 지내다 올까?"
"제주도? 갑자기 왜?"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학원도 없고 숙제도 없이 아무것도 안 하는 한 달을 보내게 해주고 싶어서. 다시는 그런 기회가 없을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안 하러 제주도를 가?"
"응?"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건데 제주도까지 가냐고."
"그야... 여기 있으면 아무래도 학원에 가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고, 마음의 여유도 안 생기고, 나도 아이들에게만 집중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까. 학원도 다 그만두고 아무것도 안 할 건데 왜 제주도까지 가냐고."
"도서관이 인구, 면적 대비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하니까 도서관도 다녀보고, 바닷가에서 실컷 놀아도 보고... 그러려는 거지."
"돈은? 돈은 어떻게 할 건데?"
"알아보니까, 지금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학원비면 한 달 살 수 있을 것 같던데?"
"도대체, 아무것도 안 하러 제주도 간다는 게 무슨 말인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아무것도 안 하며 제주도 한 달 살기'는 명분도 실리도 없다는 남편의 완강한 반대로 없던 일이 되었다. 보통은, 남편의 결정대로 하고 난 후 시간이 지나면 '그때 남편이 말리길 잘했네, 그 사람의 판단이 옳았어.'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제주도 건은 달랐다. 강행하지 않은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있다.
하루를 빈틈없이 꽉 차게 한 방울의 누수도 없이 사는 사람, 실적을 쌓고 성과를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 사람이라면 응당 그렇게 사는 게 도리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신선놀음으로 비쳤을 것을 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해서 삶을 쉽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치킨집을 하면서 치열하게 살던 시기였고, 몇 년 간 엄마 손길의 결핍을 느꼈을 아이들과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이유와 목적이 불분명하고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는 하루를 살지라도 무의미한 시간은 아닐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서로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 삶을 의미 있게 풀어내는 방법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집을 꺾었지만 아쉬운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브런치에서 글이라는 것을 쓴 것이 2년이 넘었다.
시간과 양을 앞세워 뻐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쌓인 시간과 글의 개수만큼 나의 글이 뛰어나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감동을 주는 글도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같잖은 글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보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고 삭제해버리고 싶은 글도 있고 나 자신이 좀 멋있어 보이는 글도 있다.
2년은 수양의 시간이었다. 좋아요 수, 댓글 수, 구독자 수, 조회수에 연연하던 마음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졌고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저 즐기게 되었다.
오늘의 브런치는 내게,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도 되는,
그래도 의미 있고 재미있는 제주도 같은 곳이다.
5학년 여름, 야외 수영장에 놀러 갔다.
가득 찬 사람 때문에 수영장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잠수라도 할라치면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발길질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때 옆에 있던 모르는 이가 사납게 던진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뒤끝 한번 긴 나...)
"앗! 차가워! 왜 물을 튀기고 난리야? 수영도 못하는 게!"
알록달록한 가짜 꽃이 잔뜩 달린 수영모자를 쓰고 물속에 서있기만 해도 물놀이라고 여기던 시절이다. 수영은커녕 물에 떠있는 것도 힘들었지만 친구들과 잡기 놀이를 하고 물장구를 치는 것이 마냥 좋았다.
"나 잠수하는 거 봐라? 몇 초 동안 숨 참나 한번 봐줘~?"라고 하면 동그랗게 손 잡고 섰던 아이들이 "나도 나도" 하면서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 숨 참기 대결을 벌이기도 하던 곳.
반에 좋아하는 남자아이라도 있으면 물놀이를 핑계 삼아 슬쩍슬쩍 맨살을 닿아보기도 하며 찌릿 전해지는 전기를 즐기기도 했던 곳.
물놀이는 안 하고 돗자리에서 간식만 잔뜩 먹으며 물속에서 노는 이들을 보기만 해도 즐겁던 곳.
수영폼이 어쩌네 저쩌네 지적해도 서로 고만고만한 걸 알기에 마냥 행복했던 곳.
그랬던 그 시절의 수영장을 나는 어른이 되어 브런치에서 보았다.
수영선수만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영선수들이 뚜렷한 목적을 갖고 연습을 하는 곳은 따로 있다. 한 레인을 막아놓고 그곳에서만 연습을 하기도 한다. 제대로 배운 폼을 뽐내며 빠른 속도로 레인 이쪽에서 저쪽까지 쉬지도 않고 왔다 갔다 하는 이를 보면 멋있어 보이지만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그들 나름의 재미가 있겠지만 나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잠시 그들을 쳐다보다가 북적북적한 물 한가운데서 나를 향해 손 흔드는 벗들을 향해 첨벙 뛰어들게 된다. 선수가 아니어도 모두가 물놀이에 진심이고 행복한 그 순간에 진심이다. 게다가 수영을 어디 스승에게서만 배우던가. 친구에게도 배우고, 엄마에게도 배우고, 때로는 바닷가에 살았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익히기도 한다. 그저, 빠져 죽지 않고 즐길 수 있을 정도면 된다.
전문 작가이거나 빈틈없이 글을 써내는 사람만 브런치를 유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뚜렷한 목적을 가진 작가들이 모여 글을 써 내려가는 곳은 따로 있을 테다. 브런치에도 그런 이들이 사방에 벽을 치고 연습하는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서로의 글에 날 선 비판과 사랑의 채찍질을 가하고 어떤 비난도 감내하는 이들을 볼 때면 그들 나름의 사명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잠시 그들을 들여다보다가 내 마음이 편한 곳, 함께 놀아보자고 하는 벗들을 향해 몸을 돌린다. 브런치는 누가 누구의 글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안다. 모든 글이 귀하고 모든 작가가 글에 진심이라고 믿는다. 선수의 눈에는 한낱 개헤엄처럼 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자 저마다의 유희다.
매의 눈으로 서로의 글을 꼼꼼히 읽는 것은 가르치기 위한 게 아니라 배우기 위함이다. 작가의 마음을 배우고 삶에 감사하는 법을 배우며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는 곳이 브런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