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학기말 성적표가 나왔습니다.
기말고사 성적뿐 아니라 중간고사, 수행평가까지 모두 합산해 등급이 정해지는 학기말 성적표를 아이는 오매불망 기다렸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의 성적으로 지원 가능한 대학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3 1학기에는 등급이 나오는 과목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전체 성적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고2 마지막 성적표는 아이에게도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요.
학교에서 종이 성적표를 받기 며칠 전, 대국민 서비스 나이스에 이미 성적은 올라왔습니다.
아이가 한창 게임에 빠져있던 시간이었죠. 아이는 작전상 후퇴할 수도 자리를 무단이탈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나 봅니다. 큰 소리로 제게 묻더군요.
"어떻게 됐어? 수학 몇 등급이야? 국어는? 영어는? 아니다. 물리는? 아 참! 생물은?"
"와~~ 다 올랐네~~ 근데, 수학은 내려갔다. 어째 이런 일이..."
수학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아이는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아..."
짧은 한숨을 토해내던 아이는 케빈처럼 양손바닥을 양볼에 대고 당황해했습니다. 수학만큼은 자신 있었던 아이의 자존심에 심한 스크래치가 난 거죠. 하지만, 아이는 이내 다른 과목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오~~ 과학 다 올랐네~. 와 국어! 대박! 나 1학기 때 학원 그만두자마자 그때부터 성적 오른 거 알지? 엄마?"
"그러네. 학원 안 다니고 혼자 했는데 이 정도라니... 진짜 열심히 했나 보네~"
궁둥이 팡팡 당한 아이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 다시 거만한 자세가 됐습니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한 거야!"
"하하. 그런 말이 있어? 멋진데? 고사성어로 있을 것 같은데 한번 찾아볼까?"
있었습니다.
육참골단(肉斬骨斷) : 자신의 살(肉)을 베어 주고(斬), 상대방의 뼈(骨)를 자른다(斷)는 뜻. 즉, 작은 손실을 보는 대신에 큰 승리를 거둔다는 전략이다. 손자병법 36계의 11계인 이대도강(李代挑僵/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하여 넘어진다)과 같은 말이다.
이대도강[ 李代桃僵 ] :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하여 넘어지다'라는 뜻. 작은 손해를 보는 대신 큰 승리를 거두는 전략이다. 중국의 고대 병법인 36계 가운데 11번째 계책으로, 적전계(敵戰計)에 속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대도강 [李代桃僵] (두산백과)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 아냐? 엄마?"
"그래그래~ 딜을 좀 할 줄 아네. ㅎㅎ 수고했어~ 그런데 말이야. 다음엔 네 살 말고 제발 엄마 살 내어주라. 얼마나 내어줄 살이 많냐. 뼈는 네가 다 취하고."
"푸하하하."
마음의 평정을 찾은 아이는 다시 전사의 길로, 게임 세상 속으로 유유히 떠났습니다.
성적표는 나왔지만 생활기록부는 아직 완성 전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특히 교과 선생님께서 작성해주시는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은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대학에 지원할 학생이라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영역입니다. 학기말이 되면 각자 지원하고자 하는 전공에 적합한 주제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수업시간에 발표를 합니다. 그걸 갖고 선생님들은 학생의 생기부를 채워주시는 거죠. 당연히 아이는 불만 가득입니다.
"아... 이런 거 진짜 싫어. 교육이 썩었어. 공부만 하기도 바쁜 애들한테 뭐 이런 걸 자꾸 시키는 거야. 게다가 어떻게 모든 과목에서 전공적합성을 살리라는 거야. 말도 안 돼. 나처럼 관심 전공이 없는 애는 어쩌라는 거야. 대학 가지 말라는 거야?"
저와 나란히 앉아 발표를 위한 논문을 찾던 아이는 끝도 없이 구시렁거렸습니다. 제 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머릿속에서는 '그럴 거면 다 집어치워~~~~'라며 고함을 지르는 장면이 그려졌지만, 마른침을 삼키고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엄마도 이게 네 입시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어. 그런데 네가 발표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이유는, 내년 이맘때 가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야. '아... 그때 발표 좀 제대로 할걸... 그것만 했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말이야."
"모두가 숫자로만 나를 평가하는 것 같아. 성적이 잘 나오면 '공부를 잘한다'고 하지 '열심히 했다'고 하지는 않잖아!"
아이는 점점 격양되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자니 땡깡이라도 부리고 싶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아~ 네가 이렇게 성적을 올리기까지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었을지 엄마는 누구보다도 잘 알지. 이 성적표는 네 고등학교 2년을 통째로 갈아 넣어서 받은 거잖아. 한여름 대상포진과 싸우면서 받은 거고. 숫자로 평가하는 거 맞아. 이 숫자를 받기 위해 네가 얼마나 너와 치열하게 싸웠는지 그 고생을 평가하는 거지..."
"엄마가 알아주는 거는 나도 알아.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잖아. 그저 숫자로 줄 세우고 숫자로 당락을 결정하고."
"숫자로밖에 판단 못하는 건 아쉽지만, 결국 숫자에 그 사람의 노력과 열정이 녹아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모두 머리가 좋거나 운이 좋아서 좋은 성적을 받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대부분은 자기가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 보상받는 거고, 평가자 입장에서는 숫자에 그게 녹아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발표 준비에는 관심도 없고 짜증이 한껏 오른 아이에게 "그래도 정신 차리고 발표 준비하자~"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습니다. 절실한 마음, 순수한 마음에서 스스로 의지를 갖고 발표를 한 게 아닌데, 그깟 생기부에 몇 자 적히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습니다. 그렇게 적힌 활동의 진정성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자기소개서나 면접에서도 절대 드러나지 않을 것이고 그게 낙방의 원인이 될 수도 있겠죠. 안 하니만 못한 활동을 하라고 닦달하느라 아이와 멀어지고 서로 진 빠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 말자. 하지 말고, 일찍 자~"
마음이 상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아이는 채 30분이 안되어 도로 방 밖으로 나왔습니다.
"왜 안 자고 나왔어?"
"독서록 하나 쓰려고... 수학 과목만 독서록을 안 냈더라고..."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컴퓨터방으로 터덜터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니 안 그래도 튀어나온 제 눈두덩이가 더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미 쌓일 만큼 쌓인 아이 어깨의 무거운 짐은 엄마가 대신 짊어져줄 수 없는 온전한 아이의 것입니다.
아이가 빨리 가든 느리게 가든, 엄마는 두세 걸음 뒤에서 조용히 따라가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의 보폭을 맞춰 뒤쫓아 가며, 처연한 뒷모습에 마음 아파하며 말이죠.
감정이 복받쳐 울음이 터질 것 같아도 엄마는 참아야 합니다.
이미 아이의 등은 흐느낌으로 들썩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 대신 살을 내어주고 싶은 심정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오로지 아이의 살로만 취할 수 있는, 그런 뼈이기 때문입니다.
호랑이의 해입니다.
아이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을 앞두고 있습니다.
한 손에는 창, 한 손에는 방패를 들고서, 아니면 맨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길 위에 서 있을 겁니다.
호랑이를 만나 살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느끼더라도, 뼈만은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로 시련을 이겨낼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의 2022년을, 조용히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