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까지 D-291
한 달 전, 너는 엄마 아빠에게 군 적금을 다른 은행에 하나 더 들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훈련소에서 들어놓은 20만 원짜리 적금이 있었지만 올해부터 달라진 정책 때문에 하나 더 들고 싶다고 했지.
네가 우편으로 보내준 가입 자격 확인서를 들고 아빠는 은행에 가서 네 이름의 적금 하나를 더 들었다. 전역까지 앞으로 아홉 달 밖에 안 남아 큰 금액을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다만 몇십만 원이라도 더 받는다는 게 참 고마운 일이지.
은행과 협약을 맺어 5%에 달하는 금리가 적용되는 '장병내일준비적금'.
말 그대로 전역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목돈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높은 금리만도 큰 혜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올해부터는 전역할 때 원리금의 1/3을 정부가 지원하는 '3:1 매칭 지원금 혜택'이 신설됐다고 했지. 국가가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단다.
"OO아~ 아까운 네 청춘의 일부를 나라를 위해 내어 준 것, 고맙게 생각해.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 약소하지만 준비해보았어. 군대 월급이 50만 원이 넘으니까 그중 일부를 저금해보는 게 어떠니? 저금한 돈의 3분의 1을 또 줄게. 예를 들어 네가 월 40만 원씩 18개월을 납부하면 원금에 은행 기본금리 5%, 이자 지원금 1%까지 더한 754.2만 원을 받게 되는데, 거기에 3:1 매칭 지원금 248.8만 원을 더 주겠다는 거야. 그러면 넌 1,003만 원을 만들어 제대할 수 있는 거야. 제대 후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든 일반 사회인으로 돌아가든 다시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힘들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치고는 약하다는 것 알지만 내 마음은 그보다 더 크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금쪽같은 청춘을 국가에 헌납한 이들에게 어떤 무엇이 보상이 되겠니. 군 가산점제를 부활하자거나 여성들도 똑같이 군대를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단순히 페미니즘에 반대하기 위한 주장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이유란다. 억울하고 아깝겠지.
하지만 아들아.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엄마가 함부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18개월의 시간이 내일을 준비하는 데 귀한 시간이 되기를 염원한다.
규칙적인 생활과 잘 짜인 식단으로 마음과 몸을 단련하는 시간.
전역 후 펼쳐질 20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준비하는 시간.
가족, 연인, 친구들에게서 잠시 벗어나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
살다 보면 그런 시간은 절대 주어지지 않거든. 기본적인 의식주는 물론 물리적인 시간도 그냥 허용, 제공되지 않는단다. 당장 먹고살 궁리를 하라고 재촉하고, 멋진 꿈을 이루라며 다그치지. 그러니 어찌 보면 군대에 있는 18개월은 긴 인생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겠더구나. 'Gap Year'라는 이름으로 진로 설정을 위한 시간을 일부러 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과 지원이 필요한 법이지. 군인의 경우, 내일을 꿈 꿀 시간과 기본적인 편의를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조금은 위로가 될까?
안되지? 위로도 안되고, 오히려 화만 나지? 군대를 안 가봤으니 엄마가 이렇게 쉽게 얘기하는 거겠지? 너뿐 아니라 여기저기 원성이 막 들린다.
그럼에도,
만기 된 장병내일적금 통장을 열어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숫자를 헤아리며 흐뭇해하는 전역날, 적립된 금액만큼이나 네 가슴, 머리에도 내일을 준비하는 많은 것들이 쌓여있기를 희망해본다.
아니다. 아니야.
그런 게 없어도 좋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전역해도 좋다. 그저, 전역 후의 네 삶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건강한 마음과 몸만 준비하고 나와도 좋다. 잘 먹고, 잘 쉬고, 드라마도 많이 보고, 틈틈이 운동도 하면서...
그저 행복하게 남은 9개월을 지내다 와도 좋겠다.
어떤 내일이든, 그저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