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이라는 게 차오를 때

전역까지 D-270

by 늘봄유정

네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학부모 독서 모임이 있었단다.

네가 입학하던 그 해, 2017년 5월에 엄마가 만든 모임이 아직 이어오고 있다. 코로나로 1년 반 쉬었던 걸 감안해도 오래됐지?

작년 하반기에 모임을 다시 시작할 때만 해도 회원은 여섯 명이었단다. 그마저도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한 두 명 빠지면 세명이 나오는 날도 있었지. 하지만 그게 더 좋았단다. 자신의 이야기를 원 없이 풀어놓는 시간을 가진 사람들은 그 모임을 좋아하게 되어있거든. 엄마는 그들의 이야기를 한없이 들어주는 역할을 하면 되니 얼마나 편하냐. 회원은 몇 명 안되었지만 대신 꽤 편안한 모임이 되었지.


새 학기가 시작되어 신규 회원을 모집했단다. 담당 선생님께서 주신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지. 자그마치 열네 명이 신청했더구나. 독서동아리 창설이래 최고 흥행성적을 이뤘단다.

'고등학교 학부모들이 이렇게 독서에 관심이 많다고?'

엄마의 의문은 불순한 의도를 찾는 노력으로 바뀌었고 명단을 자세히 뜯어보기에 이르렀단다. 몇 명의 이름이 눈에 띄더구나. 작년 한 해, 엄마가 학부모회장을 하던 시절 학교를 향해 날 선 비난을 내게 쏟아붓고 나의 입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바라던 분들이었지. 그런 전적이 있다고 해서, 입시에만 혈안이 된 엄마들이라고 해서 책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지.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해야겠다고 다짐했단다.


독서모임을 앞두고 회원 신청을 한 분들에게 구글 설문을 돌렸단다. 독서모임에 신청하게 된 동기, 앞으로 바라는 점, 읽고 싶은 책을 물었지. 학교에 대한 관심을 갖고 신청했다는 분과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분이 반반이더라. 설문 결과와 첫 책으로 정해진 <오은영의 화해> 질문지를 인원수에 맞게 출력했단다. 집에 있는 커피머신과 캡슐을 바리바리 싸들고 비장하게 학교로 향했지.


전원 참석이었다. 회의실 가득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심호흡을 하고 몇 가지 말씀을 드렸지.

첫째, 학부모 독서모임의 취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학부모님들이 학교에 자연스럽게 자주 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과, 아이들에게만 집중하는 삶에서 벗어나 '나'에게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학교에 오신 김에 담임선생님도 만나시고 급식실도 둘러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둘째, 우리는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기 위해 모였습니다. 책을 읽은 소감, 함께 나누고픈 이야기에만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학교를 향한 건의사항이나 입시 이야기는 후속 모임에서 나눠주시고 지금 이 두 시간 동안은 삼가 주세요.
셋째, 유난히 올해는 인원이 많습니다. 한 분이 짧게 얘기하셔도 모두가 말씀하시다 보면 시간이 꽤 걸리겠네요. 그러니, 말씀하실 때 모두가 시간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도록 시간 안배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다행히 두 시간이 알차게 흘러갔단다. 간혹 너무 길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셨지만 첫 시간이니 자유롭게 두었지. 온전히 책에 집중하는 독서모임이 되어서 꽤 만족스러웠어. 하지만 종료를 알리는 순간, 이야기는 예상했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단다. 네다섯 분의 어머니들이 학교를 향한 불만과 학부모회의 안일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지. 다 예상했던 바였다. 나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들어주었단다. 그리고, 더 이상 학부모 임원이 아닌 자로서 정중히, 하지만 하고 싶던 이야기를 했지. 말미에는 학부모님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임기를 마친 나 스스로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으로 모임을 마무리했단다.

5년 전, 독서모임 내내 입시 이야기만 하는 3학년 학부모를 저지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던 내가 아니었단다. 어느 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당당히 내 의견을 말할 수 있었지. 고등학교 학부모 생활 5년에 빛나는 짬이었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시기, 군사경찰대 군부모 밴드에는 '용사 진급식'과 '또래상담병' 임명식 소식이 올라왔다. 4월 1일 자로 상병을 달고 '또래상담병'이 된 네 소식을 보았지. 늠름하면서도 눈에 힘이 팍 들어간 네 사진도 보았다. 어리바리하던 이등병 시절의 모습은 사라졌더구나. 군 생활의 짬이 차오른 멋진 상병 O! O! O!


짬이 차오른다는 것은, 시간이 채워준 경험치를 훈장처럼, 완장처럼 달고 권위를 앞세우는 것은 분명 아니라 생각한다.

시간이 흐른다고 모두 짬이 차는 것도 아닐 테지.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밀도 있게 경험하고 치열하게 고민했는지에 따라 차오르는 짬의 양은 다를 것이다. 차오른 짬으로 주위를 세심히 살펴보고 의견을 나누며 스스로 반성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 그게 짬이 차오른 자의 의무가 아닐까 한다. 네가 앞으로 또래상담병으로서 해야 할 일이며 남은 270일 동안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네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너와 네 동생 덕분에 차오른 짬으로 엄마가 학부모의 소임을 마칠 때쯤, 너도 제대를 하겠구나. 그때쯤이면 우리는, 상대에게서 차오른 짬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피식... 웃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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