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연휴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 일주일 후 아빠의 자격증 시험이 있다는 것도 우리를 막지 못했다. 너와의 만남을 한주 미뤄볼까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단다. 하지만 생일을 앞둔 네게 미역국이라도 한 그릇 먹이고 싶다는 마음이 엄마 아빠를 재촉하더구나. 거리가 멀다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쌓여있는 일도 제쳐둔 채 길을 나섰다.
너니까.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쫙 펴진 어깨에 조금 더 커 보이는 키, 당당해진 걸음걸이.
석 달만에 다시 만난 너는 또 한 번 몰라보게 달라졌더구나. 먹고 싶다던 매운 갈비찜과 양념게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았지. 선임이 되고 나니 나도 모르게 꼰대가 되더라는 얘기, 특수 부대로서 솟구치는 자부심에 대한 이야기, 레펠을 타다 실수해서 손바닥이 까졌다는 얘기, 또래상담병이 되어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임을 위로해준 이야기... 네가 먹고 말하고 웃는 모습에, 안 먹어도 배부른 경험을 지난 면회에 이어 반년만에 또 했구나. 입대 후 10개월이 되니 지루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배우는 바, 생각하는 바가 많다는 말에 네가 대견하고 멋있었다.
저녁 메뉴가 마음에 안 들어 우리와 먹고 들어가고 싶다고, 점심때부터 저녁시간까지 면회를 신청했다고 했는데... 네 계획대로 함께 있어주지 못한 채 일찍 올라와야 해서 미안했단다. 네가 보고 싶다고 그렇게 떠들었으면서 그 몇 시간을 더 주지 못했다. 이기적인 엄마다. 돌아오는 길이 밀릴 것을 염려했고 10시에 잡아놓은 온라인 독서모임을 어째야 하나 고민했지.
하지만 그것보다도, 네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이 힘들었단다.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엄마 아빠는 그날 서로를 대하기가 참 불편했단다. 널 보러 내려가는 차 안에서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고 해소하지 못한 채 너를 만났거든. 평소에도 자식들에게 싸운 내색을 잘 안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네 앞에서는 더더욱 티를 낼 수 없었지. 우리는 아무 일 없는 듯한 일상의 연기를 영화배우 뺨치게 해냈단다. 네가 웃을 땐 따라 웃고 네가 물으면 친절히 답하고 네게 궁금한 것을 끊임없이 질문했지. 엄마 아빠 둘 다 너만 따라다녔단다. 네가 찍어준 사진에서도 우리 둘의 어색한 기류가 보이더구나. 네게, 들켰을까?
엄청난 정체에 여섯시간동안 갇혀 돌아오는 길, 운전대를 나누는 일 외에 우리가 나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단다. 그럴 줄 알았다면 너와 좀 더 있다가 올걸 그랬다.
운전하는 내내, 옆에서 말없이 공부하는 아빠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생각했단다.
삶은, 외롭고 위험한 줄타기 같다는 생각.
줄타는 사람은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받고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자 하나 지켜야 할 것, 생각해야 할 것이 참 많지. 줄의 팽팽한 정도를 민감하게 느껴야 하고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도 기민하게 대처해야 한다. 소리꾼과 주거니 받거니 재담을 즐기고 청중까지 신경 써야 하지. 자칫 딴생각을 하거나 안일한 마음으로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3m 높이의 줄에서 떨어질 것이다. 죽기야 하겠냐마는 광대로서의 위신이 함께 추락하는 것이지.
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도 평온한 얼굴을 보여야 하는 것이 삶 같다. 아무도 모르게 내 안의 웅성거림과 파동을 견뎌야 하는 것이.
줄의 텐션과 바람의 방향, 세기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삶 같다. 내가 마주한 사람과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하는 것이.
수없이 타 온 줄이라고 방심하면 안 되는 것이 삶 같다. 다 안다고 생각하고 선을 넘어버리는 순간 관계, 공간, 시간이 모두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이.
온갖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느슨해진 줄, 청중의 환호에 젖어 놓쳐버린 박자, 집중력을 잃고 미끄러진 발바닥. 엄마는 줄에서 떨어져 버린 광대의 심정으로 하루를 보냈단다.
어색하고 답답한 공기로 가득했던 차 안에서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빠는 줄 위에 아직 서있을까.
삶은, 줄타기와 같다.
떨어지면 다시 올라가면 되지.
줄의 양끝으로 달려가 팽팽하게 잡아당겨 동여 메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시 올라가면 된다.
그러면 아마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격려를 보낼 것이고 광대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멋진 놀이로 화답할 거야. 대신 이전보다 더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줄타기를 하게 될 거다. 줄 위에서 겸손해지기 위해, 줄타기를 오래오래 즐겁게 하기 위해 다시 안간힘을 쓸 것이다. 얼굴엔 전보다 더 평온한 미소를 머금으며...
8개월 남은 군 생활, 너만의 줄타기를 잘 해내기 바란다.
8시간 받아놓은 면회시간을 못 채워준 엄마 아빠 때문에 실망하는 날도 있을 테고, 매일 똑같은 생활에 신물 날 때도 있을 것이며, 사람 때문에 힘든 날, 훈련 때문에 힘든 날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만큼의 이야기보따리를 챙겨서 다시 줄 위로 올라가면 된단다. 그러면 소리꾼과 청중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풍성 해질 테고 보여줄 재주가 많아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