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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pr 30. 2022

무엇이 옳은가 - 후안 엔리케스

오늘은 무죄였던 일이 내일은 유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이던 날이었다. 분명 벚꽃도 흩날렸을 것이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한 손에는 자판기 커피를, 한 손에는 대학로고가 그려진 파일을 끼고서 단과대학 로비를 걸어 나왔을 때, 이런 풍경이 펼쳐져야 한다. 그래야 서사가 완성이 된다. 흘러가는 청춘을, 끝나가는 봄을 놓치지 않고 싶던 그들은 계단에 풀썩 앉아 잠깐의 티타임을 보냈다. 수업 내용에 대한 진지한 토론도 오가고 내일 있을 등록금 투쟁 시위에 대한 이야기도 했을 테다. 그때, 그들 앞을 지나가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을 보며 누군가 한마디를 던졌다.

"저기 하늘색 원피스 입은 학생 8점!"

"그래? 내가 보기엔 6점인데? 난 그 옆에 있는 여학생에게 9점."

"이유가 뭐야?"

"가슴이 커서. 난 과거 있는 여자는 용서해도 가슴 작은 여자는 용서 못해!"

이렇게 낯 뜨거운 대화가 오고 가는 그들 사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내 가슴이 큰지 작은지 슬쩍 만져봤을 수도 있겠다.


여기서 내가 저지른 죄는 두 가지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 한다는 선배들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정작 눈앞의 부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문제의식조차 갖지 않은 것이 하나요, 25년이 지난 일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라고 말하며 은근히 선을 그을 만큼 여전히 비겁하다는 것이 또 하나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대적 맥락이 그랬다'라는 것이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괜찮아. 그때는 우리 모두 성인지 감수성 떨어지던 시절이잖아.'라는 말이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미래학자인 후안 엔리케스< 무엇이 옳은가 >라는 책은, 무심하게 버려져있던 내 기억을 소환해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가 되었고 그때는 맞았는데 지금은 틀린 '나'가 되어버리는 윤리적 기준에 혼란스러웠다. 저자는 이렇게 나를, 독자를 시종일관 흔들어댔다.

"오늘날의 보편적 규범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 해도 미래의 어떤 시점에 가서는 그 행동 때문에 가혹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p15)


성과 관련된 규범, 유전자 변이, 생명체 재설계, 정신적 질병, 기후변화, 부의 분배, 동물의 권리, 가짜 뉴스, 인종차별, 성소수자 문제, 종교 갈등, 일회용품 사용과 환경, 난민, 전쟁...

저자는 인류가 현재 직면한 모든 문제에 대해 내리고 있는 판단과 행위들이 절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우리가 비슷한 문제에 대해 과거 조상들을 어떻게 비난하고 질책했는지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다양한 사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노예제도'였다.

"1860년까지 로어 미시시피 밸리에는 미국의 다른 어떤 곳보다 백만장자들이 많았다. 그들 모두는 노예 소유주들이었다. 1860년대 미국 노예는 400만 명에 이르렀고 총 약 35억 달러의 가치로 평가되었는데, 이는 미국 전체 경제의 단일 자산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제조업 부문과 철도 부문을 합친 규모도 가능했다."(p158)


한 시대가 당연하게 수용했던,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는 제도를 우리는 이제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를 장악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할 것만 같던 가치는 한순간에 무너지거나 사그라들지 않는다. 설사 반대의견을 가졌거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기는커녕 의견을 내는 것조차 힘든 일이다. 1863년 노예해방 선언을 한 에이브러햄 링컨조차도 1858년에는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백인과 흑인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평등하다는 견해에 찬성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링컨이 다른 이들과 달랐던 것은 학습하고 변했고 진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계몽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것이 법률을 통해 고쳐지기까지는 더 지난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계속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기준들이 내일은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많은 이가 그 끔찍한 관행에 동참하고 그것을 보호하며 또 널리 퍼트렸던 방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훗날 후손들이 완전히 비도덕적인 관행이라 비난할 일들을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묵인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p163)


저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윤리적 기준의 변화 속도에도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과학기술로 인해 과거의 나를 심판하는 시간이 당겨지고 있다는 얘기다.

"과학은 성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흔들어대고 기술은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여러 선택권을 제시한다."(p36)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부터 해왔던 일들이 다른 대안들로 한결 쉽게 대체되면 후손들은 우리가 했던 일들을 혹독하게 비판할 것이다. 과거에는 그 대안을 선택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많은 비용이 드는지에 대해선 잊어버린 채 말이다."(p95)

"기술은 강력한 촉매제고 불가역적인 변화를 한 단계씩 높여간다. 이 변화는 심지어 윤리의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윤리는 우리가 배우고 적응하는 속도보다 떠 빠르게 변한다." (p316)


저자는 우리가 나름의 기준을 갖고 옳다고 판단하는 것들에 얼마나 논리적 오류가 많은지를 다음의 사례를 들어 따져준다. 난민과 이민자를 대하는 방식의 문제, 무의미하고 무모한 살인행위인 전쟁 문제, 과도한 절차와 지나친 조심스러움으로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의약품 문제, 시스템 안전성 문제 대신 극단적인 경우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고 있는 자율주행 자동차.

책을 읽다 보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오만하고 고집스러운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책임한 존재라는 사실까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현재의 어떤 현상, 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알고도 방관하거나 허용하는 우리는 모두가 유죄다. 시대적 맥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과연 우리가 갖고 있는 기준이 옳은가를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것이 저자의 주문이다. '어쩔 수 없었다. 최선이었다.'라고 하는 관행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하여 답을 찾기 위한 학습의 과정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것, 그리하여 변화의 시점을 앞당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옳은'일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각성해서 올바른 존재가 될 순 없다. 그러니 우리의 토론에선, 또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선 특정 시대의 법률이나 종교적인 잣대에 얽매이지 말자. 대신 수수함, 관대함, 공감, 공손함, 겸손함, 연민, 예의바름, 진실함 등의 여러 핵심 원리를 가운데 놓고 판단하자. 이것들이 바로 우리가 윤리적이기 위해, 즉 조금이나마 더 '올바르기'위해 궁극적으로 발견해야 하는 덕목임과 동시에 우리의 인간성과 시민사회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이다."(p316)


과거의 나, 오늘의 나, 미래의 나에게 공평하게 들이댈 수 있는 절대적 윤리란 없다. 따라서 '나는 무조건 옳다'고 자신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족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옳지만 저들은 틀렸다고 확신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은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에게 언제나 유죄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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