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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ug 15. 2022

공정 이후의 세계 - 김정희원 -

이제, 공정 담론에 종지부를 찍을 때.


지긋지긋하던 참이었다. 지난 20대 대선에서 정점으로 치달았던 젠더이슈와 공정 담론, 그 끝나지 않는 논쟁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관련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

후안 엔리케스의 <무엇이 옳은가>에서는 시대를 초월하는 절대적 윤리란 없으니 오만함을 떨치고 학습과 실천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말했다. 김누리 교수는 <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  <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 두 권의 저서를 통해 능력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고 일상의 민주화, 존엄주의 교육을 통한 개혁을 주장했다. 마이클 샌들은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에서 승자에게는 오만을 남기고 패자에게는 굴욕만을 안기는 능력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하지만 승자들에게 겸허할 것과 패자들에게는 '제비뽑기 입시'같은 개인화된 해결책만을 제시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여전히 공정 담론에 대해 갈증을 느끼던 차에 만나게 된 책이 바로 김정희원교수의 <공정 이후의 세계>였다.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인 저자는 허울뿐인 공정 담론에서 벗어나 다른 질문, 다른 삶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개별주의적 존재론에 기인한 능력주의와 공정 프레임을 넘어서서 관계적 존재론에 기반한 정의의 개념을 다시 세우자는 것이 책의 요지다.


1부 <공정의 해체와 재구성>에서는 공정 담론을 무기로 기득권과 이해관계를 수호하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정에 대한 공론화를 막고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공정', '능력에 따른 보상'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무조건 중립적이고 합리적이라 여겨지지만 오히려 사안이 갖고 있는 실체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감춰진 사실과 맥락을 보려는 시도도 차단한다. '공정, 불공정'여부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차별, 혐오를 조장하고 갈등을 극대화한다. 이때다 싶어 정치는 이를 적극 활용한다.

p19 지금 한국 사회에서 손쉽게 내세워지는 공정이라는 가치는 전 사회에 걸쳐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 가치로서의 공정, 또는 사회 정의를 확보하기 위한 필수 원리로써의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공정하지 않다"는 외침은 많은 경우 자신이 느끼는 부당함, 억울함, 박탈감 등의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p25 문제는 한국 정치가 (한국사회가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의 근본적 요인과 구조적 기원을 탐색하려 애쓰기보다 오히려 이런 심리를 적극 이용하면서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능력에 따른 차별,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개념 앞에서 늘 주저하던 나였다. '그게 당연한 것 아닌가? 무엇인 문제지?'라는 질문에 대해 머릿속 어지럽게 흩어져있던 답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명료해졌다. 능력이라는 것은 '순수한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 마이클 샌델이 강조하는 '운' '신의 은총'에 더해 경제적 계급과 구조적 불평등의 영향을 받는다. 능력이라는 것 자체가 절대적으로 순수한 개념이 아닌데 어떻게 능력에 따른 차별과 보상이 공정할 수 있을까.

p96 능력의 개념은 진공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주의, 인종주의와 같은 지배 논리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저자는 공정 담론과 능력주의의 허구성을 증명하는 사례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자 구성 비율 변화 역사를 보여준다. 1969년 두 명의 흑인 음악가들이 심사과정에서의 인종 차별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고 이후 선발과정에서는 오디션장에 장막이 설치하는 절차가 추가되었다. '블라인드 채용'이 실시된 것. 놀랍게도 이 절차 하나로 0%였던 여성 연주자 비율은 꾸준히 증가해 현재 남녀 성비는 50대 50이 되었다. 하지만 최초에 문제를 제기했던 흑인 연주자는 여전히 106명의 연주자 중 단 한 명이다. 왜 그럴까? 단순히 시험제도, 평가절차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클래식 교육에 들어가는 재원과 정보, 인맥 등을 흑인들은 여전히 누릴 수 없다. 이러한 근본적인 사회구조적 문제는 해결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능력에 따른 보상과 차별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불공정이 아닐까.


저자는 말한다. 문제는, '능력주의'가 이미 충분히 비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선, 개혁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고... 공정에 가려진 차별과 혐오 덕에 부와 권력, 계급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굳이 능력주의에 기반한 공정 담론을 해체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비판에 귀 기울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선택적 무지'와 '전략적 무지'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선택적 무지는 특정 영역에 대해 선택적으로 무지의 상태가 유지되는 것으로, '우리 장애우'라는 표현을 썼던 대선 후보가 반복되는 지적과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차별적 언어 습관을 고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선택적 무지'의 상태로 살아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으며 무지와 무감이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기득권의 덫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전략적 무지란 사람들의 의심, 정보의 부족이나 불확실성, 허위정보를 이용해서 무지 혹은 거짓을 적극적으로 구성, 조작, 유지하는 것으로 백신 음모론이 대표적 예다.

시종일관 날카로운 저자의 지적은 선택적, 전략적 무지자들을 향한 일침으로 느껴졌다. 이제 모른 척 좀 그만하고, 기득권을 내려놓고 공론장으로 나와 이야기하자고 말이다. 그래서 허망했다. 과연 저자의 일침이 가 닿기나 할까? "응~ 아니야~"라면서 귀를 막고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져 다수가 된다면, 선택적 전략적 무지를 일삼던 사람들이 이젠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선택적 전략적 인식'을 하려나?



2부 < 다시 쓰는 정의론 >에서 저자는 '돌봄'과 '정의'를 바로 세워 다른 세상을 꿈꿔보자고 한다.

인간은 모두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적인 관계라는 '관계적 존재론'에 입각해 자신만이 아닌 사회 개혁을 위한 '돌봄'의 개념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번아웃'을 예로 든 것이 인상적이었다. 번아웃은 나의 내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직, 사회 구조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급진적인 자기 돌봄에 더해 구성원 서로를 돌보는 문화, 사회에 돌봄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 문화를 만들자고 한다.


또한 저자는 모두가 존엄하고 모두에게 정의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 '보편적 정의'를 바로 세우자고 주장한다. 이미 충분한 소득과 자산을 보유한 기득권이 이길 가능성이 높은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애초에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 '완전한 자유경쟁'이란 없다고 말한다. 게다가 자유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은 국가 복지 정책의 수혜를 입기 위한 경쟁에 또 뛰어들어야 한다.

저자는 경쟁, 비교, 선별의 무한 루프에서 벗어나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치를 찾자고 하며 '한 사회의 보편적 이상을 설정하고 그 이상에 모두가 분명히 도달할 수 있도록 배분의 수준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보편적 정의는 실현될 수 있다'(p163) 고 강조한다.


한 사회의 평등적 이상을 어떻게 정할 것이며 배분 방식과 수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조직 내에서 실천할 수 있는 정의의 원칙과 기준을 '분배정의, 절차 정의, 관계 정의, 정보 정의'의 개념으로 제시한다. 정의는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구조와 문화이자 일상적 실천이라고 말하며 (p212) 공동체가 할 일은 구조와 문화를 쇄신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문제는 정치였고 해결책도 정치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을 제쳐두고 정치공학적 계산에만 매달리는 정치를 '유예의 정치'라고 칭한 저자는 대안으로 '정체성의 정치'와 '예시의 정치'를 제안한다.

정체성의 정치는 차별, 혐오, 폭력의 원인은 사회구조에 있다는 주장이다. '젠더, 계급, 인종, 장애유무, 성적 지향, 나이, 종교, 언어, 민족, 국적, 학력, 출신지역'등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교차적으로 형성되며 그에 따라 억압, 불평등, 차별의 양태도 달라진다. 예를 들면 흑인이면서 퀴어인 여성의 경우 억압 체계와 불평등이 다층적이다. 따라서 투쟁, 저항의 대상은 백인, 이성애자, 남자 등의 상대 진영이 아니라 자본주의', '제국주의', '자유시장경제', '가부장제'라는 것이다.

p225 젠더, 계급, 인종, 장애 유무, 성적 지향, 나이, 종교, 언어, 민족, 국적, 학력, 출신지역 등 모든 범주들은 다르게 겹쳐질 수 있고 그에 따라 억압, 불평등, 차별의 양태도 달라진다. 또한 이 범주들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다른 효과를 만들어낸다.

p228 억압된 모든 이들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가부장제라는 정치경제적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예시의 정치'는, 소수만 누리는 자유가 아닌 모두의 해방을 우리 삶 안에서 실현하면서 대안 세계를 우리의 현재 속에 구축하려는 협력과 연대의 노력이다.(p230) 기득권들이 강요하는 유예의 정치, 쉽게 말해 '급한 것부터 해결하고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라는 달콤한 말에 말려들어서는 안 되며, 미래의 정치적 이상을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원하는 가치와 이상을 가진 사회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길고도 지루했던, 답을 찾지 못해 답답했던 공정 담론에 종지부를 찍을 때다.

태생이 정의롭지 못한 '능력주의', 능력주의에 기댄 공정 담론, 거기에 편승해 세대 갈등을 부추기고 기득권을 지킨 정치. 이것들과 결별할 때다.

인간은 모두가 존재 자체로 존엄하다는 것이 정의다.

내가 상대의 존엄을 인정하듯 상대도 당연하게 나의 존엄성을 인정할 것이라는 믿음, 우리는 모두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믿음, 이 가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신뢰하는 사회. 이것이 공정한 세상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정의와 공정에 대해 가열차게 이야기하고 적극적으로 실천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서는 것. 그것만이 남았다.


국민들의 처절함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싸움에 정신이 팔린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낀다거나,

우리가 가진 고난과 고통의 근본적인 이유를 찾고 싶다거나,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을 남겨줬으면 하는 모든 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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