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밥 먹는 게 영 시원찮은 고3 아이 앞에 엄마 아빠가 함께 앉았습니다.
"한 술만 더 떠. 한 술만."
"그래. 국에 말아서 한 입만 더 먹고 가."
"나 진짜 배불러서 전혀 못 먹겠어~"
"알았어. 그럼 그만 먹어..."
아이는 저녁도 생존하기 위해 먹었습니다. '때가 됐으니 먹는다, 남들이 먹으니까 먹는다, 엄마가 먹으라니까 먹는다'이지 배가 고픈 것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꽤 까다로운 상대입니다. 주는 대로 먹기는 하지만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잘 먹었습니다."라고 하는 말속에도 영혼이 안 담겨있었죠.
그랬던 아이가 최근 들어 조금씩 변했습니다. 먹을 것에 욕구가 생긴 것입니다.
"나 오늘 저녁은 매운 떡볶이 먹을 거야. 치즈 잔뜩 올려진 거."
"나 오늘은 햄버거 먹고 싶어. 난 햄버거가 제일 좋더라. 나중에 내 자식들에게 말할 거야. 내 제사상에는 햄버거만 놔주면 된다고."
"요즘 단 게 엄청 당긴다? 특히 초콜릿."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와~~ 맛있겠는걸?"
먹을 것에 대한 욕구는 다른 욕망도 끌고 왔습니다.
"OO대학에 꼭 가고 싶어. 거기 못 가면 무조건 재수할 거야."
"담임 선생님이 다른 대학도 고려하라고 얘기하시길래, '전 OO대학 갈 건데요?'라고 했다?"
어디서 저런 패기가 나왔는지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아이는 고등학생 퀴즈 프로그램에도 나가보겠다고 했습니다. 엄마의 지나가는 제안에 큰 관심을 보이더니 급기야 지원해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방송 다시 보기를 하며 문제를 풀어보았고, 꼴찌는 면할 것 같다는 자신감도 비쳤습니다. 무엇보다, "고등학생 때밖에 남길 수 없는 추억이야~"라는 엄마 말에 그러겠노라 했습니다. 그 말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욕'이라는 게 생겼다니... 하고 싶은 게 생겼다니...
상실된 식욕만큼이나 없던 작은 아이의 의욕이 식욕, 입맛과 함께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입시를 치르며 하루하루 피가 말라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가 차오르고 있는 것 같아 덩달아 흥분됐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퀴즈 프로그램을 나가기 위해서는 출연 지원서를 내야 했는데, 아이는 그걸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꿈(원하는 직업)은 무엇입니까?
해당 꿈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해당 꿈을 위해 하고 있는 노력은 무엇입니까?
해당 직업군과 관련된 본인의 에피소드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아이의 고민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랜 방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했고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도 못했습니다. 가혹하리만큼 꿈과 진로를 재촉하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아이는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천천히 고민하는 중입니다. 다만,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며 공부만은 놓지 않고 있습니다. 전공은 못 정했지만 원하는 대학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중이지요.
그것만으로도 대견한데, 조금씩 의욕이 보인다고 속력을 올리려 한 엄마입니다.
아이가 유치원 때 일입니다. 유치원 등원 차량 시간은 다가오고 밥은 빨리 먹어야 하는데, 아이는 도통 입에 담긴 음식물을 씹지 않고 있었습니다. 잘 먹는 큰아이는 두 공기나 먹고 학교에 갔는데 작은 아이는 반공기 먹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요. 매정하게 밥그릇을 빼앗고 굶기는 날도 있었지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기다리는 날도 있었죠.
"OO아 냠냠 쩝쩝! 씹고 삼켜야 또 먹을 수 있지."
"....."
"아~~ 해봐~ 아~~ 아직도 씹고 있어?"
"....."
"얼른 먹어야 유치원 가서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지~"
아이는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내 입은 지금 빨간불이야. 밥이 들어갈 수 없다고!"
"빨간불? 그게 무슨 말이야?"
어리둥절하는 엄마를 쳐다보며 오물오물하던 아이가 이내 말했습니다.
"자! 이제 초록불이야. 먹을 수 있어."
그러더니 숟가락 가득 밥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입을 신호등에 빗대어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호등 불빛에 맞추어 밥을 먹고 있는 아이에게 저는 더 이상 재촉할 수 없었습니다. 늦으면 늦는 대로 기다려주는 수밖에 없었죠.
아이가 열아홉이 되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아이의 진로 신호등은 빨간불입니다. 방향을 정하고 열정과 의욕이 차올랐을 때, 아이는 비로소 스스로 초록불을 켜고 길을 나설 것이라 믿습니다. 내내 빨간불인 신호등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