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선물을 사 왔다. 식탁 위에 두고 쓸 소금 후추 그라인더였다. 해외 입국자에 대한 격리조치가 해제되자마자 친구는 서둘러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코로나 전에는 거의 매년, 떠나온 고향이라도 되는 듯 뉴욕으로 휴가를 다녀오던 그녀였다. 그녀에게 그곳은 여행지가 아니었다. 맛있는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서, 쇼핑이 하고 싶어서, 공원 벤치에 앉아있고 싶어서 찾는 곳이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뉴욕은 전생의 기억을 품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식탁 위의 그라인더를 볼 때마다 여행이 고프다. 사골국에 소금, 후추를 쓱쓱 갈아 넣을 때는 더욱 그랬다. '어디로?'라는 질문을 던지면, '딱히 어디라고는...'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로 가고 싶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그저 낯선 거리를 걷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마냥 걷다 걷다 보면 추억을 가끔 마주치지
여행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건 그 도시의 랜드마크가 아니다. 누구와 어느 길거리에서 어떤 공기를 마시며 서 있었는지가 떠오른다. 그건 굳이, 사진을 찾아보지 않아도 기억이 난다.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해 뛰어 들어간 피자 가게와 근처에 유명한 에그타르트 가게가 있던 거리.
인파에 휩쓸려 걷고 또 걷다 보면 시장도 나오고 고급 호텔도 나오고 강도 나오고 멋진 야경도 나오던 거리.
걷다가 잠깐 멈춰 서서 누군가를 생각하며 기념품도 사고, 그러다가 또 멈춰 서서 길거리 음식을 먹기도 하던 거리.
너무 유명해서 늦게 가면 살 수 없다는 쿠키를 사려고 이른 아침부터 대기하느라 서성이던 거리.
배불리 저녁을 먹고 들어왔지만 숙소 바로 옆에 유명한 라면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나가 줄을 서고, 한 시간 반을 기다렸던 거리.
초저녁에 잠이 들어버린 작은 아이를 힘겹게 업고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낄낄거리며 걷고 또 걷던 거리.
지도를 펼치고 한참을 걷다가 "이쪽이 아닌가 보다."하고 왔던 길 돌아가다가, 다시 "아까 거긴 가?" 하며 다시 뒤돌아도 누구 하나 짜증 내지 않고 우르르 몰려다니던 거리.
그 거리에 서있던 너와 나는 이곳에서 매일 보던 너와 내가 아니었다. 조금 더 친절했고 조금 더 배려심이 많았으며 조금 더 행복했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그래서일 거다. 이곳에서의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서.
이 거리가 익숙했던 우리 발걸음이 나란했던 그리운 날들 오늘 밤 나를 찾아온다
아직도 생각만 하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거리도 있다.
폐업한 가게인 줄 모르고 내비게이션만 믿고 따라 들어간, 주택가 막다른 골목길이었다. 차를 돌려 나오려는데, 갑자기 수십 마리의 투견들이 우리 차를 에워쌌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내 시야에는 침을 질질 흘리며 으르렁 거리는 개들과 < STOP >이라고 뻘겋게 쓰여있는 경고문구가 들어왔다. 잘못 움직여 개를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깨갱 소리가 골목에 울리기라도 한다면 대문이 벌컥 열리며 험상궂은 사내가 총을 들고 나올 것 같았다.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차를 돌려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문득 궁금해지곤 한다. 그곳을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 그 집은 아직 있을까...
신비로움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거리도 있다. (거리라고 부르기는 뭐하지만...)
어느 인디언 소녀가 산양을 따라갔다가 처음 발견해서 < Antelope Canyon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골짜기.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신비로운 풍경을 처음 봤던 소녀의 심경이 되어 경이로웠다.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에 길을 잃을까 염려되다가 또 넋을 잃고 감상하게 됐다. 시간제한이 없다면 깜깜한 밤, 이곳에 갇혀 별을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풀은 내 가슴이 밤하늘에 외쳐본다 이 거리는 널 기다린다고
막혔던 하늘 길이 열렸다. 몇 년간 지난하게 이어졌던 입시 뒷바라지의 길도 곧 끝날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