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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Nov 07. 2019

D-100 프로젝트 < D-52 >

미안합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을 수 있다.( 키키 키린 )               

100일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살면 하루가,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액받이 무녀

왕에게 일어나는 흉한 일, 즉 액을 받아 왕의 액운을 없애는 대신 그 기운에 의해 건강을 잃는 무당.

동생을 보면 '액받이 무녀'가 생각난다...


수능을 보는 조카를 응원한다며 마카롱에 아이스크림, 빵까지 바리바리 사들고 금일봉까지 챙겨 방문한 동생.

같이 점심을 먹으며 오래간만에 한참 수다를 떨었다. 얘기 나누다 보니 온통 엄마 흉보기다. 평소 말이 없고 속내를 잘 안 비치는 동생이지만, 엄마 얘기만 나오면 방언 터지듯...


< 제1막. 결혼 >

대학원 졸업 후 국내 자동차 회사 연구원으로 취직한 동생은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고 아기 낳고 집에 눌러앉아버린 큰딸에게 섭섭했던 맘을 동생의 성공으로 해소하셨다. 집안의 자랑이었던 동생은 홍대 앞에서 기타를 가르치며 인디밴드를 하던 남자와 연애를 했고 부모의 극심한 반대를 이겨내 결혼을 했다.

범생이에다가 공대를 나오고 대학시절에도 <수학의 정석>을 취미 삼아 풀던,  '꽉 막힌'줄 알았던 동생이 좋아하던 음악은 헤비메탈이었다. 자유와 해방의 느낌을 준 음악, 그 음악을 연주하는 남자, 그 남자에게서 느껴진 더 큰 자유로움. 둘은 행복했다. 둘 사이에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고 넷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제부가 차린 기타 학원은 마침 오디션 프로그램이 난립하던 시절이라 호황을 맞았다. 아이들은 착하고 똑똑했으며, 밝고 활기찼다.


요기까지만 보면 뭐가 걱정일까 싶겠지만...


< 제2막. 아이를 맡긴 죄 >

결혼 후에도, 출산 후에도 직장을 계속 다닌 동생은 아이를 맡아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다행히 어디 알아볼 것도 없이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가까이 살고 계신 친정엄마. 보모들이 아기들을 학대했다거나 밥을 굶겼다거나 다쳤는데도 말을 안 해줬다는 등의 기사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친정엄마만큼 믿음직스러운 분은 없었다. 워낙 깔끔하시고 집안일도 야무지게 하는 분, 게다가 흥이 많으셔서 아이들이랑 음악 틀어놓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춰주시는 분. 더할 나위 없었다. 책임감, 사명감도 강하신 분. 남의 집 일도 내일같이 해주시는 분.

그게 문제였다. 딸의 집도 내 집같이. 쓸고 닦고 채우고 비우고.

아이를 맡긴 것도 죄송한데 집안일까지 완벽하게 해 주시니 감사한 맘도 당연히 있었다. 문제는, 거기에 덤으로 들어야 하는 '잔소리'였다. 남에게 부탁했다면 딱 거기까지였을 것들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잔소리, 핀잔을 매일매일 들어야 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이를 맡겼고 대안도 없었기에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할머니와 할머니 음식을 너무 좋아했으며 밤늦게 퇴근하는 딸을 위해 저녁밥까지 준비해주시는 정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 들어야 하는 게 있었다. 엄마 주변의 모든 이들에 대한 '뒷담화'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인데, 남을 헐뜯는 소리, 맘에 안 드는 이유들을 듣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걸 동생은 10년을 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좀 쉴까 싶으면, 하루 종일 아이들만 상대하셔서 대화가 고팠던 엄마는 동생을 붙들고 남 얘기를 하셨다. 동생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래도 참았다. 아이를 맡겼으니...


< 제3막. 아들 같은 사위 >

금쪽같은 내 딸과 반대하는 결혼을 한, 미운 놈, 못된 놈, 맘에 안 드는 놈. 친정엄마는 그 사위에 대한 못마땅함을 은근한 멸시와 무시로 드러내셨다. 남들은 밝은 성격으로 보는데 엄마는 남자가 너무 말이 많다고 보셨다. 털털하고 소박한 옷차림과 씀씀이를 엄마는 지저분함과 궁상으로 보셨다. 아이들과 기타 치고 놀아주는 자상한 아빠를 '촐싹거린다'라고 표현하셨다. 제부는 그 모든 걸 감내하셨다. 싫은 티, 야속한 티 하나 안 내시고 그저 껄껄 껄껄 웃으셨다. 그럼에도 동생은 중간에서 괴로워했다. 엄마는 이따금 내게 전화를 걸어 "아휴... 나쁜 년... 지가 뭐가 부족하다고..."라며 결혼을 뜯어말리지 못한 걸 후회하셨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아들같이 편한 사위'라고 하신다. 아들같이 편해서 말씀도 거르지 않고 막 하신다. 큰 사위는 어려워서 건네지 못할 말들을 서슴없이 하신다. 동생은, 그게 또 맘에 걸린다.

 

< 제4막. 퇴사 >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했던 동생은 학교 다닐 때도 조퇴와 결석을 밥 먹듯 하더니 회사에서도 결근이 잦아졌다. 새벽 6시 통근 버스를 타고 출근해서 이르면 6시, 늦으면 8시에 퇴근하는 일정이 힘에 부쳤다. 거기에 하루 종일 오매불망 엄마를 기다린 아이들 동생을 밤늦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새벽녘 동생이 출근하는 게 싫었던지 작은 아이는 밤새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작은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동생은 퇴사를 결심했다. 부모님의 만류도 있었지만 회사에도, 집에도 못할 짓이었다고 느꼈다. 게다가 내 '살림'이라는 걸 해보고 싶었다. 아이들을 위해 밥을 하고, 학원을 데려다주고, 저녁을 먹으며 여유롭게 두런두런 얘기도 하고...

졸지에 실업자가 된 엄마는 그 생활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10년간 보던 아이들이 눈에 밟혔고, 딸네 집의 살림이 엉망이 되는 꼴도 눈에 밟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가 이제는 '참견'이 돼버린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아휴~ 이게 언제 적 건데 아직도 안 먹고 그대로니?"

"빨래는 왜 아직도 안 걷었니?"

"화장실 청소 안 했니? 물때가 꼈네. 내가 해주고 갈까?"

"사과는 얼마 주고 샀니? 저기 농민 마트가 훨씬 싼데, 왜 거기서 샀니? 나중에 사다 줄게."

동생은 '내 살림인 듯 내 살림 같지 않은 내 살림'을 하며 몸도 마음도 지쳤다. 지쳐서 퉁명스럽게 대하면 엄마도 토라져서 한 일주일 발걸음을 안 하신다. 하지만 이내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먹을 걸 잔뜩 들고 예고도, 기척도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신다...


"언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감자랑 양파야. 금방 싹 날걸 왜 그렇게 두 박스씩 사서 나눠주는 거야? 결국은 먹지도 못하고 버릴걸... 양파도 왜 10킬로짜리를 두 망이나 사? 아빠랑 둘 먹을 것만 사지... 양파라면 양파즙도 지긋지긋 해."

"엄마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알아? '이거 100g에 얼마니?'야. 100g당 가격이 조금이라도 싼 걸 찾기 위해 슈퍼 세 군데씩 돌아다니는 엄마랑 난 다르잖아? 난 그 시간이 아까워서 온라인 배송시키는데, 매일 와서 '개당 얼마니, 왜 작은 귤로 샀니'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 그리고 계란은 왜 싸다고 세 판씩 사? 결국 우리 집에 다 갖다 주는 거야. 난 내 맘대로 사과 하나도 맘 편히 못사..."


미안함이 몰려왔다. 나 대신 엄마의 모든 관심과 간섭을 받아온 동생. 일찍 결혼해 자주 왕래하기는 어려운 거리에 살고, 나 살기 바쁘다고 자주 찾아뵈지 않아서 난 몰랐다. 아니 모른 척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맘도 있었을지도...  싫은 게 있으면 싸우더라도 엄마한테 할 말 따박따박해대는 나와는 달리, 참고 속으로 삭히는 동생은 제대로 화내 본 적도 없었다. '액받이 무녀'처럼 다 받아내고만 있었던 거였다. 그래서 맘도 힘들고 몸도 힘들었던 거다.

자매라고는 하지만, 살갑지 못한 성격 탓에 동생을 챙기는데도 소홀했던 내가 미웠다.

언니는 시집가버려 수다 떨 사람도 없이 외롭고 힘들었을 대학시절의 동생을 생각하니 맘이 짠했다.

인정받지 못하는 연애를 하느라 늘 방문 닫고 들어가 울었을 동생을 위로하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다.

학창 시절 사소한 것으로 다투던 것도 미안하고, 어린 시절 심한 장난을 했던 것도 미안했다.

이제는 액받이 무녀 대신 '드림캐쳐'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쁜 기운은 모두 흘려보내고 좋은 꿈만 꾸기를...

그러려면 좀 더 대범해지고 당당해져야 한단다. 참지 말고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한단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슴까지 침묵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야 한단다...



사실, 큰딸 된 입장에서는, 엄마에게도 미안하다.

정 많고 흥 많고 사람 좋아하는 엄마지만, 자신이 만든 가시 때문에 곁에 누굴 두는 것이 힘든 사람...

늘 외로운 사람.

조곤조곤 대화하는 걸 좋아하고, 자신의 알뜰한 살림살이를 칭찬받고 싶어 하는 사람.

그래서 딸들이랑 잘 지내고 싶은 사람...

그거 하나를 못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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