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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07. 2022

송편 안 빚는 추석

"거기 OOOO호죠? 여기 경비실인데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저희 집에요? 아니요? 아무 일 없는데요? 왜 그러시는데요?"

"아, 그 집 부엌 후드 쪽에서 흰 연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고 신고가 들어와서요. 확인차 연락드렸어요."

"아... 지금 몇 시간째 떡을 찌고 있어서 그랬나 봐요."

"그래요? 불나거나 그런 건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그럼 다행이고요."


10여 년 전 추석을 이틀 앞둔 저녁, 경비실에서 걸려온 인터폰이었습니다. 깜깜한 밤, 아파트 꼭대기층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광경을 지켜보던 행인은 얼마나 걱정이 됐을까요. 몇 시간째 떡을 찌고 있는 줄은 모르셨을 테니까요. 그 시절 추석이면 동네 지인들이 저희 집에 모여 송편을 빚곤 했습니다. '떡, 한과 1급 자격증'을 보유했으며 전통음식연구소 전문가 과정을 수료한, 나름 동네에서는 떡 선생이라고 불리곤 했거든요.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송편 빚기를 아이들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재료를 제공했습니다. 시끌시끌 복작복작하게 송편을 빚으면 비로소 명절을 실감했습니다. 다 쪄진 송편을 그릇에 예쁘게 담아 나눠주고 나면 제 몫으로는 못생긴 애들만 남았어도 마음이 그득해졌습니다. '이게 명절이지~'하며 자족했지요.


송편 맛있기로 유명한 친정어머니는 매년 재료를 잔뜩 들고 우리 집으로 찾아옵니다. 쌀가루는 제가 준비하고 어머니는 소를 준비하지요. 집에서 혼자 빗기는 쓸쓸하고 지루하니 큰 딸네 집에서 수다 떨며 만들고 싶은 마음이시죠. 게다가 전문가용 찜솥도 있어 한번에 60개 정도는 거뜬히 찔 수 있으니 일도 빨리 끝납니다. 가끔은 동생네 식구들까지 함께 모여 송편을 빚습니다. 왁자지껄, 분주한 명절 풍경에 무뚝뚝한 우리 집 아들들도 어느새 식탁에 앉습니다. 제 몫의 송편 여남은 개 정도는 손수 만들게 되지요.

엄마 송편의 시그니처 속재료는 밤입니다. 통밤을 넣는 집도 많지만 어머니의 밤송편은 다릅니다. 찐 밤의 속을 다 파내어 꿀과 함께 버무린 소를 넣었지요. 통통한 송편을 한입 베어 물면 달달하고 부드러운 밤이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그 맛을 알기에 매년 송편 빚기를 끊지 못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는데, 흔쾌히 그러자고, 오시라고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지난주부터 줄곧 자소서에 매달려 있는 작은 아이가 걸린 까닭입니다. 자신만의 언어로 직접 쓰겠다며 엄마의 도움도 일절 거절한 아이는 쓰고 고치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옆에서 시끌벅적 판을 벌려 떡을 빚기가 조심스럽더군요. 입시가 벼슬인가, 입시는 입시고 명절은 명절이지 싶다가도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수시 원서 접수 때문에 제 마음도 편치가 않습니다.

'전이나 두어 가지 부쳐 시댁에 들고 가고 떡은... 올해는 접자!'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만 아쉬워하는 어머니 목소리가 자꾸 따라다녀 개운치가 않습니다.


송편을 빚는다는 것은 단순히 추석 차례상에 오를 떡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재료를 준비하고 사람을 맞이할 여유와 심신의 안정이 갖춰져야 가능한 일이었지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새 곡식과 햇과일이 풍성하여 아무 걱정이 없으며 오로지 음식을 장만하고 송편을 빚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흥겨운 날이 한가위일 테죠. 그러니 송편을 빚는다는 것은, 그 시간과 공간을 누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일이요 그러한 날이 모두에게 계속되기를 기원하게 되는 일입니다. 매년 지인, 가족들과 모여 복작복작하게 송편을 빚던 날을 감사하게 되는 일이요 그러지 못하는 올해에 심난해지는 일입니다.


사진을 찾아봅니다. 예쁜 꽃송편부터 호박 모양, 나뭇잎 모양까지 다양합니다. 작년에는 떡 도장으로 납작하게 눌러 무늬를 넣은 송편 만들었지요. 깨, 밤, 콩, 녹두 외에 초콜릿, 치즈를 넣었던 송편도 기억납니다. 아이들이 참 좋아했었죠. 손이 근질거리고 엉덩이가 들썩거립니다. 저쪽 방에서 자소서 쓰는 키보드 소리가 톡탁톡탁 들려오는데 제 마음은 속없이 두근거립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 매거진의 이전 글, 로운 작가님의 <명절 음식, 아직도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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