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밑에는 거뭇거뭇 짧은 수염들이 자라 있고 쇳소리 나는 목소리를 한 네 명의 소년들과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까르르 거리는 세명의 소녀들이 달뜬 얼굴로 치수에 맞는 옷을 찾느라 탈의실을 드나들었지. 그런 너희들을 보며 엄마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조그맣던 녀석들이 언제 이렇게 컸대? 벌써 교복 입는 중학생이 되다니..."
교복을 입은 너희들은 사진관으로 가서 증명사진을 찍었고 내친김에 단체사진도 찍었어. 우리 집 현관에 걸려있는 그 사진이다.
요즘 엄마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조그맣던 녀석들이 언제 이렇게 컸지? 벌써 수능 치는 수험생이 되나니... 내년에는 동네에서 술도 마시고 다니겠네? 세월 참 빠르다..."
하루도 빠르지만 한 해는 더 빠르다. 스무 해는? 눈 깜짝할 사이구나.
D-29 ( 2022.10.19)
네가 다닌 중학교에서는 기타와 오카리나 중 하나를 반드시 배워야 했지. 집에 형이 배우다 만, 놀고 있는 기타가 있어 너는 망설임 없이 기타를 선택했다. 일주일에 고작 한번 배우는 거였고 기타에 큰 흥미를 갖지 않았지만 어쩌다 침대에 앉아 기타 줄을 튕기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악기 하나 정도는 배워둬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은 엄마는 너와 형이 어렸을 때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둘 다 흥미를 갖지 않았지. 엄마가 어렸을 때 치던 피아노를 외가에서 가져오기까지 했지만 1,2년 정도를 배워도 통 실력이 늘지 않기에 그만두었다. 우쿨렐레도 시도해봤지만 반짝 하고 내려놓았지. 중학교 1학년 때 배운 기타도 그때가 다였다. 기타에 폭 빠져 학원을 다니고 전자기타에 앰프까지 장만하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너는 시큰둥했다. 드럼이라도 배워보라는 엄마의 권유에도 반응하지 않았지. 결국 너는 '악기 하나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자식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싶었던 엄마의 욕심은 혼자만의 시간을 채워줄 취미를 만들어주기 위함이었지. 하지만 그런 건 스스로 혼자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 생각이었다. 필요하다면, 원한다면 언제든 스스로 구하고 배울 수 있는 일인데 말이야.
"대학 가면 어떤 동아리에 들어갈까?"
요새 부쩍 대학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네가 엄마에게 물었지.
"재미있는 거 해. 재미있는 거. 공부하고 연구하는 동아리 말고 신나는 거."
너의 시간을 채워줄 신나는 것을 많이 찾으며 살기를 바란다.
D-28 ( 2022.10.20)
중학교 1학년 때 '명예경찰단'에 들어갔다.
학교폭력 예방 및 또래보호 활동을 하는 교내 단체였는데, 순번을 정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복도와 교정을 순찰하는 것이 주요 활동이었다. 활동이 있는 날이면 조끼를 챙겨 입고 제일 먼저 급식을 먹은 뒤 각자 맡은 구역을 돌아다닌다고 했지. 아무리 명예경찰이라 쓰인 조끼를 입었다 해도 같은 학년 친구들의 순찰이 학교폭력 예방에 도움이 됐겠냐마는, 자기가 속해있는 곳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만이 배우는 바, 깨우치는 바가 많을 것이라는 것이 엄마 생각이었다. 때로는 귀찮기도 했을 테고 짜증도 났을 텐데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맡은 활동을 완수하는 모습, 대견했단다.
뭐 먹을 거냐고 물으면 아무거나라고 답하고, 뭐 하고 싶냐고 물으면 상관없다거나 글쎄라고 말하는 너를 보면, 너란 아이는 귀차니즘과 무기력이 기본값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일이 주어지면 끝까지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지. 연신 "에휴, 에휴"라고 말하면서 말이야.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내내 그랬다. 하고 싶은 전공도, 관심 있는 분야도 없다면서 조는 법 한번 없이 수업을 듣고 꾸준히 상승 곡선인 성적을 만들어냈지. 어쩌면 너의 "에휴"는 자신을 향한 응원 또는 채찍질이 아닐까 생각했다. '영차'나 '으쌰'같은...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알아서 잘하겠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에휴~~
D-27 ( 2022.10.21)
친구들과 본격적으로 디베이트를 배우기 시작한 해다. 엄마한테 말이야.
엄마의 첫 제자들인 너와 친구들을 데리고 많은 일을 했던 한 해다. 경기도 마을교육공동체 사업 중 하나인 '학생이 만드는 꿈의 학교'를 운영했고 가을에는 '문화재 환수 디베이트 대회'에도 나갔다. 엄마가 아직까지도 디베이트 강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그때의 너희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엄마와 함께하는 게 거북할 만도 했을 텐데 그런 티도 안 내고 열심히 수업을 빛내준 네 덕분이야.
특히 엄마가 고마웠던 건 중1 여름방학 때였단다. 협회에서 운영하는 방학 디베이트 자원봉사캠프는 중고등학생이 디베이트 코치가 되어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쳤지. 성인 코치들은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관리 감독만 할 뿐 수업 준비에서부터 가르치고 심판을 보는 일까지 주니어 코치들에게 일임했단다.
엄마는 그해 이천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주니어 코치가 부족한 실정이었고 너에게 부탁을 했다. 아직 중학교 1학년이지만 보조코치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하리라 믿었지. 엄마의 믿음대로 넌 3일 동안 메인 코치를 도와 초등 6학년 학생들에게 목이 쉴 정도로 열심히 디베이트를 가르쳤다.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너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게 신기하다고 했지. 이후로 작년까지 5년 동안 방학마다 초등학생에게 디베이트를 가르쳤구나. 넌 디베이트가 싫다고 했지만 가르칠 때만큼은 열정적인 선생님이었다. 그게 참 고마웠다.
D-26 ( 2022.10.22)
중학생이 되어서도 현찬이는 네 단짝 친구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상담을 갔는데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내 녀석 둘이 점심시간만 되면 교정을 거닐면서 수다를 떨어요. 참 신기해요. 무슨 대화를 그렇게 하는지 궁금하고요."라고 했어. 중학생이 되어서도 가끔 엄마가 봉사를 하러 학교에 가면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둘이 있었다. 가끔은 서너 명이 더 합세하기도 했고.
눈이 안보일 정도로 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른 현찬이는 너보다도 더 내성적으로 보였어.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도 수줍게 인사만 하고 네 방으로 들어가곤 했지. 너랑 재잘재잘 웃고 떠드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렸지만 간식을 주러 들어가면 이내 조용해졌던 아이다.
고등학교를 서로 다른 곳에 가게 되면서 연락이 뜸해졌지. 현찬이는 휴대폰이 없어서 연락을 주고받기도 힘들었어. 게임을 하면서 안부를 묻는 게 다였는데 네가 방학 때만 잠깐씩 게임을 하니 그마저도 끊겼지. 그래도 오랜 친구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최근에는 안정적인 대학에 수시 원서를 내고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근황을 듣고 왔지. 내신이 4등급대라 좋은 대학을 쓰지 못한 것 같다고 너는 걱정했다. 그러면서 너는 말했다.
"중학교 1학년 때 현찬이에게 게임을 가르쳐준 게 너무 후회돼. 게임에 너무 빠져버려서 공부도 안 하고 성적도 떨어지고 좋은 대학도 못 가게 됐잖아. 그게 다 나 때문인 것 같아."
친구의 성적 부진을 네 탓으로 생각하는 너에게 엄마는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당황스러웠단다. 네 탓이 아니라고, 공부 대신 게임을 택한 것은 오로지 본인의 결정이었으며 모든 학생들이 자기 조절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너는 "그래도..."라고 복잡한 마음을 갈음했어.
살다 보면 그런 친구도 하나쯤 있지. 그저 미안한 친구.
항상 챙기지 못해 미안하고 같은 길을 함께 가주지 못해 미안하고 친구가 겪는 시련이 나 때문인 것 같아 미안한 친구.
그런 친구가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널 돌아보게 만들고 스스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고, 무엇보다도 그 친구를 자꾸 생각하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