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금지곡 16. 만만하니(유키스)

수능 100일 기도 자서전 #16. 2018년 열다섯 살 때

by 늘봄유정

D-25 ( 2022.10.23)

중학교 2학년 때도 6학년 때처럼 버킷리스트를 썼지. 학부모 폴리스 봉사를 하다가 로비에 전시된 네 것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두었단다.

1. 각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 거두기
2. 팝스 70개 이상 하기
3. 키 크기(이번 해에 최소 2cm)
4. 함흥 가서 냉면 먹기
5. 운전면허 따기
6. 학생 가르치기(분야 상관없이)
7. 번지 점프해보기
8. 통일 장면 보기
9. 봉사 시간 다 채우기
10. 꾸준히 운동해서 체력 기르기

독특한 버킷 리스트가 눈에 띄었어. 함흥 가서 냉면 먹기와 학생 가르치기, 통일 장면 보기였어. 학생 가르치기는 아마 중학교 1학년 방학 때마다 경험했던 디베이트 코칭 봉사 경험 때문이었겠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나를 성장시키고 그것이 얼마나 큰 쾌감인지를 느꼈던 게 아닐까. '함흥 가서 냉면 먹기'와 '통일 장면 보기'는 네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소망 목록인데 어떻게 리스트에 올리게 됐을지 네 생각이 궁금하더라.


살다 보면 소소하고 귀여운 소망부터 거창하고 묵직한 소망까지 꿈꾸게 된단다. 평생 이룰 수 없을지 모를 꿈을 꾸며 희망을 품기도 하고 작은 소망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좌절하기도 하지. 올해 너의 소망들은 어떤 결말을 맺을까. 그리고 그 결말 앞에서 우리는 또 어떤 소망을 꿈꾸게 될까.


D-24 ( 2022.10.24)

편지 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네가 어버이날 웬일로 편지를 주었지. 마땅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색종이 한 면을 빼곡히 채운 편지를 엄마는 두고두고 읽었다.

부모님께
일단 식상하게 사랑하고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먼저 꺼냅니다. 우리 집 현금부자는 이런 편지를 쓰는 게 제일 힘들지만 앞으로 안 쓸 것 같아 합니다.
이번 해 들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래서 집안의 기대와 학원의 기대가 많아져 부담스러워졌는데, 역시 사람이란 게 욕심, 욕망을 없앨 수 없나 봅니다. 주변에서 제가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고 안 하던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고 그래서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저축해서 가족 다 모였을 때 웃을 수 있는(지금도 안 웃는 건 아니지만) 가정을 만들고 그러겠습니다.
다만 지금 할 게 너무 많다는 게 한 가지 흠이네요. 게임도 하고 운동, 독서, 숙제, 수행 준비, 시험 준비, 여가생활, 디베이트 등을 해야 하는 게 가장 힘든 것 같아 정작 해야 하는 거, 하고 싶은 것을 많이 놓치는 것 같아서 지금의 기대는 져버릴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 현금부자

요약하면, 지금 할 게 너무 많아서 주변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 공부를 못하겠다, 양해해 달라, 그런 얘기였나 보다. 공부는 그렇다 해도 돈을 모으는 데 있어서만큼은 일가견이 있었던 너다. 네 지갑에는 항상 2,30만 원 정도가 있었지. 양가 조부모님들께서 만날 때마다 주시는 용돈을 모아둔 것이었는데, 통장에 넣어도 금세 지갑이 찼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널 '현금부자'라고 불렀지. 엄마 아빠한테 용돈 한 번 받지 않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낸 이는 너뿐일 것 같다. 친구들과 놀러 가도 네 돈을 썼고 엄마 아빠 생일에도 5만 원 정도는 거뜬히 선물했지. 부러웠다. 우리 집 재테크는 너에게 맡겨야 한다고 입 모아 말했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너는 말했어.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이미 이과 과목만 잔뜩 들었던 네 생기부로는 수시로 경제학과를 지원하기에 무리가 있었지. 하지만 엄마도 네게 경제학이 참 잘 맞겠다는 생각을 했어. 수에 대한 감각도 남다르고 진중하니까. 원한다면 언젠가 길은 열리겠지. 길이 열렸을 때 가고자 한다면 가게 될 테고. 그러니 서두르지 말자. 그저 너의 길을 가보렴.



D-23 ( 2022.10.25)

중2 여름은 네가 '디베이트의 노예'가 되었던 해였다.

엄마가 속해있던 디베이트 협회에서 방학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하느라 그랬지. 하루에 8시간씩 사흘 동안 진행하는 캠프에 월, 화 이틀 동안 참여해서 오전에는 강의 듣고 입안문을 쓴 뒤 오후에는 디베이트 실습을 했어. 그 해 테마가 '헌법'이었지 아마? '우리나라 헌법을 쉬운 한글로 바꿔야 한다'와 '국민 발안제를 실시해야 한다'라는, 중학교 2학년에게는 버거운 주제였는데 열심히 공부했지. 왜냐하면 똑같은 주제를 초등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했으니까 말이야.

수요일부터 사흘 동안 대전에 있는 모 초등학교에 가서 '주니어 코치와 함께하는 여름방학 디베이트 캠프'를 진행했지. 친한 친구들 다섯 명과 엄마들 다섯 명이 함께 대전으로 내려가 숙소를 잡고 봉사활동을 했다. 다시는 없을 경험이지. 이어진 강행군으로 봉사 첫날밤 너는 밤새 끙끙 앓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너는 저녁도 거르고 약만 겨우 삼킨 채 12시간 이상을 잤고, 다음날 아침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봉사를 갔다. 학교 에어컨이 고장 나는 바람에 삼복더위에 땀 뻘뻘 흘려가며 덥다고 투덜거렸지만, 사흘째인 마지막 날에는 부모님들까지 초대해 멋진 시연회를 보여주었던 너의 열정에 감복했다. 관리 코치로 동행했던 엄마도 너에게 배우는 바가 많았던 일주일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한 해를 디베이트에 스스로 갇혀 살았던 '너와 나'였다.


D-22 ( 2022.10.26)

엄마가 디베이트로 한창 바쁘던 해였기에, 가족 여행 일정을 잡을 수 없었어. 고심 끝에 아빠와 아들들만의 여행을 계획하게 됐지. 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우다 보니 중국이 궁금해졌다는 형의 말도 있고 해서 여행지는 북경으로 정해졌다. 3일간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남자 셋만 여행을 보냈다는 것은 엄마에게 '자유'나 '해방감' 이상의 것을 주었단다. 형언할 수 없는 벅참이었어. 언제 그렇게 엄마 없이도 가방 챙겨 여행 갈 만큼 컸을까...

맛있는 것을 먹을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난다는 너와 형의 말에 감동을 받고, 빈집에서 홀로 잠드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잠들 때까지 옆에 누워있어 달라던 이들이 있는 게 얼마나 삶을 따뜻하게 만드는지를 알게 해 준 사흘이었다.

여행을 떠난 남자 셋에게는 어떤 시간이었을까. 엄마 없이 셋이 떠난 여행이 허전했을까? 홀가분했을까? 그리웠을까? 옥류관 냉면보다 우리의 단골집 평양냉면이 더 맛있었다, 짝퉁시장에 가서 흥정을 해봤다, 만리장성에 올라가 봤다, 길거리에서 전갈 꼬치를 먹었다... 여행의 즐거움을 조잘조잘 얘기하던 너희를 보며 그해 여름 남자 셋의 여행이 꽤 성공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빠진 셋만의 기억이 생겼다는 것이 왠지 뿌듯했다.


D-21 ( 2022.10.27)

2학년 말이었던 12월, 전교 학생회장 선거에 나갔어.

나가볼래? 권하면 그럴까? 하고 거리낌 없이 답하는 너는 학생회장 선거도 반장 선거쯤으로 생각하며 고민 없이 나가더구나. 러닝 메이트로 택한 친구는 절친도 아니었고 임원에 관심 있는 아이도 아니었지. 진짜 절친은 다른 여학생과 팀을 이루어 나가고 네 러닝 메이트는 '내가 이런 걸 나가다니?'라며 어리둥절해하는 상황.

고민 없는 결정은 준비 없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냉정한 결과로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어. 그러니 아쉬울 것도 없나 보다 했지.

그런데 얼마 전, 그때 회장 선거 홍보물에 부착하느라 찍었던 사진을 찾아보는 엄마에게 너는 얼른 삭제해버리라고 하더구나. 흑역사라며 말이지. 그랬다. 너는 그런 아이였다. 왜 고민이 없었을까. 왜 열심히 하지 않았겠는가. 왜 속상하지 않았을까. 왜 엄마는 네 마음을 다 안다고 생각했을까...


이제는 안다. 무심하고 시크하게, 입시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보다 애가 타고 어느 때보다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고3 전체를 통틀어 스무 명도 채 등교하지 않는 요즘도 시간 맞춰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정성은 합격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냉정한 결과 대신 흐뭇한 결말을 기대해보렴.


*덧 : 각 챕터의 이름은 수능 금지곡 제목입니다.

수능 전에 들으면 수능 시험날 온종일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곡들이죠.

그 곡들의 제목을 상기시킴으로써, 금기에 과감히 맞서겠다는 엄마의 의지입니다.


만만하니 - 유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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