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100일 기도 자서전 #17. 2019년 열여섯 살 때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네 방과 형 방의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지. 방 단일화라고 해야 하나? 각자 따로 쓰던 방을 합쳐 하나는 공부방, 다른 하나는 침실로 꾸며주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단다. 먼저, 그렇게 하면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는 중3과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3이 더 공부에 집중하고 더 편하게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두 번째 이유는, 둘이 함께 방을 쓰며 정을 나눌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해서였단다. 형이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과 군대에 가게 되면 너희 형제가 정을 나눌 시간은 지금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엄마의 목적 두 가지는 모두 실패했지. 너희는 공부방에 나란히 앉아 열심히 공부하기보다는 침실에 나란히 누워 뒹굴뒹굴 쉬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함께 방을 쓰며 사이가 돈독해질 줄 알았는데, 프라이버시를 지키겠다며 침대 사이에 키 높은 행거를 가림막으로 설치했다. 공부방은 늘 휑했고 침실은 늘 복작복작했어. 그 어수선함 때문이었을까. 형은 모든 대학에 다 떨어졌고 너도 영재고, 과고, 자사고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단계에서 모두 떨어지고 말았지.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형제간의 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엄마의 야심 찬 계획은 괜한 짓으로 끝나버렸다. 1년도 못 채우고 너희들은 다시 각방으로 독립했어. 그래도 그때, 다 큰 녀석 둘이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커다란 녀석 둘이 나란히 놓인 침대에 누워 자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흐뭇했다.
중3에 올라갈 무렵, 다니던 수학학원에서 제의가 들어왔지. 네 수학 실력이 남다르다며 과학고 진학을 고려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야. 사실 중학교 1, 2학년 때까지 네 성적이 그렇게 탁월한 정도는 아니라 생각해서 특목고 진학은 꿈도 꾸지 않았던 터라 적잖이 놀랐다. 그렇게 엉겁결에 고등학교 입시의 막이 올랐지.
경기 북과고를 목표로 준비를 하던 중, 너와 나는 기왕 하는 거 영재고에도 원서를 내보기로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영재고 입시를 준비하던 아이들과 경쟁한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된다는 것, 무모한 도전이라는 것을 알았지. 하지만 자기소개서를 써보고 시험도 치러보면 먼 훗날 대입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일단 시도했다.
그렇게 시작된 영재고 입시에서 너는 1차 서류심사에 합격했지. 합격 발표를 확인하고 얼싸안으며 방방 뛰었던 그날이 선명히 기억난다. 고3이었던 형의 입시가 시작하기 전이라 너의 합격은 엄마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자식의 합격이었단다.
2차 시험 때, 해당 영재고가 있던 지역으로 1박 2일 여행을 갔지. 시험은 핑계였다. 시험을 보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격했고 네가 시험을 치던 몇 시간 동안 엄마 아빠는 초조한 마음 하나 없이 즐겁게 도시 구경을 했다. 붙으면 좋고 떨어져도 괜찮을, 시도와 도전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역시 엄마는 초조하지 않다. 불안하지도 않다.
시도와 도전만으로 충분해서가 아니다. 고입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열심히 준비해 입시를 치르고 있는 너를 보았고 믿기 때문이다. 고입 때의 경험을 발판 삼아 대입을 착실히 준비한 네가 든든하기 때문이다.
10월 체육대회 때, 너의 과감한 변신은 많은 이를 여러 번 놀라게 했지.
과묵하고 시크한 네가 화장을 하고 머리를 귀엽게 묶어 '꽃보다 남자'의 금잔디 역할을 맡아 친구들과 퍼포먼스를 한 것에서 한 번, 센터를 맡아 아이돌 댄스를 춘 것에서 또 한 번.
반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장기자랑이었고 외운 동작을 의무적으로 따라 하는 수준으로 움직이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너는 참 정성껏 추더구나. 잘 추고 못 추고를 평가하기에 앞서 '정성껏' 추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랬기에 맨 앞자리 가장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겠지. 주변에 서 있던 네 친구 엄마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의외다. 춤을 춘다는 것만도 놀라운데 심지어 엄청 열심히, 게다가 잘 추기까지... 진짜 신기하다~"
제도권 교육에서 실시하는 모든 평가, 중간중간 시행되는 각종 행사, 그때마다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역할에 대해 불만이 많고 '개혁'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는 너이지만 매 순간 정성을 다하지. 아빠 어렸을 때 가훈이 '정성을 다하자' 였다는데 할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널 보셨다면 그 가르침을 가장 열심히 따르는 손주라고 예뻐하셨을 것 같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에 나오는 이 문구처럼, 정성을 다하는 너의 태도가 너와 우리,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1년 동안 준비한 끝에 원서를 넣었던 경기 북과학고. 1차 서류는 통과했지만 2차 면접에서 탈락을 한 너는 다소 아쉬워했다. 합격한 친구들처럼 중학교 입학할 때부터 관심을 갖고 준비했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거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지. 독서 목록에 올려 두었던 <코스모스>에 관한 면접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게 탈락 이유인 것 같다고도 했다. 별 관심 없는 것처럼 보였어도 네가 꽤 원하는 일이었고 기대도 컸다는 걸 알았지. 아쉬운 마음에 전국구 자사고에도 원서를 냈지만 또 탈락. 결국은 형이 다녔던 동네 일반고에 진학을 하게 됐다.
중학교 3학년 한 해 동안 경험한 세 번의 탈락은 너에게 세 번의 '도전'으로 기억에 남았더구나. 고등학교 올라와서 그랬지. 그때 공부한 과학공부가 큰 도움이 되었고, 그때 다 떨어져 일반고에 온 것이 오히려 잘된 일 같다고. 집을 떠나 기숙사 있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힘들었을 것 같고 치열한 경쟁 분위기보다 친구들과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더 좋았다고 말이야. 세 번의 자기 소개서를 쓰면서 자신의 생기부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던 경험이 꽤 도움이 된 것 같다. 학교 활동 중 나의 진로와 유의미하게 연결되는 것을 찾으려면 처음부터 진로, 적성, 전공과 관련한 활동들을 짜임새 있게 계획하고 열심히, 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됐지. 덕분에 너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꿈이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각종 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했고 수업시간마다 탐구과제 발표를 하면서 생기부를 촘촘히 채웠구나. 실패의 경험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셈.
도전으로 기억된 탈락의 경험이 결국엔 더 큰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웃으면서 말하게 되기를...
네 중학교 졸업식과 형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 30분 간격으로 있었지. 3년 터울이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며 너희를 낳았는데 그런 대략 난감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엄마의 과실이었다. 먼저 시작한 형 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빠르게 사진을 찍은 엄마 아빠와 외할머니는 서둘러 네 학교로 이동했지. 네 졸업식을 마치고 형과 다시 만나 졸업식답게 중국집에서 회포를 풀었다. 두 아들이 무사히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우리 가족의 역사가 또 다음 단계로 나아가던 날이었지.
2020년 1월 8일.
코로나가 덮치기 얼마 전이라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한껏... 축하할 수 있던 마지막 졸업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