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을 마친 나는 미국에 사는 작은아버지 댁으로 놀러 갔다. 96년 당시 이민생활 30년이 되셨던 고모 가족과 10년이 채 안된 삼촌 가족이 계신 곳, 애리조나 피닉스였다. 회계사인 고모부 덕에 부유한 이민자였던 고모와 달리 작은아버지는 금붙이 장신구나 싸구려 장난감, 공구 등을 파는 잡화점을 하셨다. LA에 있는 도매상에서 물건을 직접 떼어와 약간의 이문을 붙여 파는 일이었는데 부부가 새벽부터 밤까지, 쉬는 날도 없이 열심히 일해야 했다. 놀러 간 거였지만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에게 조금은 도움이 될까 싶어 잡화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비를 두둑하게 챙겨주신다는 말씀에 혹했던 마음이 컸다. 기본적인 의사소통 정도만 가능해도 장사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모르는 건 두 분께 여쭤가며 일했다. 가끔 멕시칸이나 흑인 손님들이 험한 말을 하며 윽박지르는 경우도 있고 귀에 쏙쏙 박히는 욕을 한 바가지 늘어놓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생 첫 알바를 미국에서 영어로 한다는 것이 제법 재미있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시즌으로 물건이 많이 빠진 탓에 물건을 떼러 가야겠다는 작은아버지를 따라나섰다. 한 달째 피닉스에만 있는 조카에게 LA시장 구경도 시켜주고 바람을 쏘여주고 싶으셨던 것. 뒷자리 좌석을 다 떼어낸 승합차를 타고 이른 새벽 출발한 우리는 중간에 화장실 정도만 들르고 쉼 없이 달려 LA에 도착했다. 관광이 목적이 아니었다.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시장을 누비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 차에 차곡차곡 쌓는 것이 작은아버지가 그날 했던 일의 전부였다. 생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작은아버지의 여정을 쫓아다녔을 뿐인데도 후덜거렸다. 그나마 조카가 따라다니니 식당에라도 들어가 끼니를 때운다며, 평소에는 집에서 챙겨간 간식만으로 하루를 버틴다고 했다.
물건을 모두 구매하고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바로 피닉스를 향해 출발했다. 새벽 4시에 시작한 삼촌의 일정은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끝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밤 9시에 LA에서 출발해 잠 안 자고 달리면 새벽 3시 전에는 도착할 거라고 했다. 아무리 평소에 잠이 없는 삼촌이라지만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교대하며 운전해줄 수도 없어 답답했지만 혼자 여섯 시간 가까이 운전하겠다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출발한 지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았을 때 뒷바퀴 한쪽이 터졌다. 승합차를 꽉꽉 채운 짐의 무게를 낡은 타이어가 견디지 못한 듯했다. 작은 아버지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놓아둔 '자키'(정확한 명칭을 모르겠다. 작기라고 검색해도 나오고 자키라고 검색해도 나오는데...)를 꺼냈다. 차체를 수동으로 들어 올리는 유압장치인 자키는 몸체가 쇳덩이라 그런지 작지만 강했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라는 듯 삼촌은 순식간에 스페어타이어로 갈아 끼우고 다시 출발했다.
미국의 고속도로는 우리나라의 그것과 달랐다. 불빛도 없지만 차도 없었다. 도로 양옆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는데 보인다 해도 끝없이 펼쳐진 평야뿐이었다. 구경할 것도 없고 우주 한가운데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그저 전조등이 비추는 거리만큼만 보이고 그만큼만 알 수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조수석에 앉은 내가 졸면 온종일 운전하고 일을 본 삼촌까지 졸릴까 봐 이를 악물고 참았는데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었다. 우리 둘 다 재잘재잘 살갑게 말 거는 성향들이 아니니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디오를 들으며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삼촌은 졸리지도 않나?' 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꾸벅 졸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흔들고,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떨구는 삼촌을 본 것이다.
뭐라도 해야 했다. 계속 이대로 가다간 뭔 일이 날 것 같았다. 앞뒤로 오고 가는 차량은 없으니 추돌, 충돌 사고는 피한다 해도 도로보다 2m는 낮은 도로 옆 평야로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흠! 흠!"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놀란 삼촌은 잠을 깼다. 물도 드려보고 저 밑바닥에 있는 기억까지 탈탈 털어 옛날 얘기를 했다. 얼마나 더 가요, 매번 이렇게 깜깜한 도로를 어떻게 다니셔요, 얼마 만에 한 번씩 물건 떼러 가세요, 몇 개 되지도 않는 질문으로 시간을 벌었지만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안 났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자면 안 되는데... 내가 자면 삼촌도 자는데... 그러면 사고 나느.....
얼마나 잤을까. 이상한 느낌에 눈이 번쩍 떠졌다. 눈을 뜸과 동시에 차는 옆길로 방향을 틀고 있었고 급한 경사를 따라 도로 밑으로 내려가다 차체가 내쪽으로 기울었다. 그때부터는 슬로 모션이었다. 위기의 순간 내 눈은 동체시력을 탑재했다. 삼촌과 내 사이에 놓여있던 자키가 내 눈앞을 지나 날아갔고 창이 깨졌고 차는 두 바퀴를 구른 후 바른 자세로 멈추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는데 기억나는 장면은 느리다.
사고 직후의 기억은 희미하다. 경찰차가 왔지만 혼자 고꾸라져서인지 그냥 돌아갔던 것 같다. 삼촌은 저녁을 먹으며 약간의 반주를 했는데 다행히 그게 걸리지는 않았다. 졸음운전을 강하게 주장했으리라. 차는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름모꼴이 되었다. 견인차에 차를 달고 인근 모텔에 주차를 한 뒤 일단 방을 잡았다. 날이 밝은 후에 차 상태를 보고 운전을 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봐야 한다고 했다.
아찔한 사고를 맞닥뜨리면, 사람이 너무 놀라면 정신이 흐려지고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정신이 번쩍 나고 각성 상태가 되어서 잠도 오지 않았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우리는 아침을 먹고 견인차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집으로 돌아갔다. 물건을 내리고 차는 바로 폐차됐다.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고 했다. 다음날 보니 내 몸도 곳곳이 멍투성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키가 내 머리나 몸을 치고 날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온 조카에게 자동차 사고를 선물한 것도 모자라 큰 부상까지 당하게 했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며 삼촌 부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날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몇 년간은 차에 탔을 때 잠들지 못했다. 큰 버스를 타건 승용차를 타건 상관없었다. 미국에서의 아찔한 자동차 사고 기억은 한동안 트라우마가 되어 나를 괴롭혔다.
작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사고가 났어도 일을 하러 나갔고 자동차를 구입했고 물건을 떼러 LA에 갔다. 그렇게 수십 년을 쉼 없는 이민자로 살았다. 음주운전에 걸려 오랜 기간 감호소에 있어 작은 어머니가 혼자 잡화점을 꾸려야 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장사를 접고 다른 사람의 가게를 봐주고 있다. 작은아버지의 외아들은 장성해 번듯한 회사에 다니고 가정을 이루었으며 부모님에게 손자 손녀를 안겨주었다. 그는 작은 어머니와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린다.
하룻밤 아찔한 사고가 평생의 무용담이 되어 떠드는 나와는 달리 삼촌의 인생은 매일이 아찔함의 연속이지 않았을까. 크게 다치거나 쓰러지지 않았으면 툭툭 털고 일어나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하루를 살아야 했던 아찔한 시절을 어떻게 버티셨을까...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보글보글과 함께하고픈 재미난 주제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댓글로 제안해주세요. 참여를 원하시는 작가님들은 매주 일요일 주제가 나간 이후, 댓글로 [제안] 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