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금지곡 19. 빨간 맛(레드 벨벳)

수능 100일 기도 자서전 #19. 2021년 열여덟 살 때

by 늘봄유정

D-10 ( 2022.11.7)

고등학교 2학년, 자퇴를 고민하던 1학년의 방황은 끝났지만 입시의 중압감과 내신, 수행의 과중함에 스트레스는 심했던 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찾지 못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다며 대회에 나가고 수업시간에 자진해서 주제발표도 하고 귀찮지만 임원선거에도 나갔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의 교육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절망했지. 바꿀 수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이내 책을 펴고 문제를 풀었다. 하루는 수학과, 하루는 컴퓨터 공학과, 하루는 전기전자공학과를 기웃거리다가 건축학과를 기웃거리기도 했어. 양가 할아버지가 모두 건축을 전공하셨고 두 분 모두 건설업을 하셨으니 네가 건축학과에 간다면 '건축가의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꿈꾸게 되었다'라고 말하자는 농담을 했지.


힘들다고, 답답하다고, 짜증 난다고, 속상하다고... 그 모든 속의 말을 엄마에게 털어놓는 것이 참 좋았다. 친구들과는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다면서 엄마에게는 온갖 넋두리와 하소연을 늘어놓는 것이 엄마는 좋았다. 그 모든 것이 그만두고 싶다고, 포기하고 싶다고 들렸던 게 아니라 잘하고 싶다고, 인정받고 싶다고, 성공하고 싶다고, 행복하고 싶다고 들렸기 때문이거든. 그래서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수능을 열흘 앞둔 지금, 어느 때보다 편안한 얼굴, 밝은 얼굴의 너를 본다. 지난 3년간 포기하지 않고 성실했던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보여서, 엄마도 편안하다.


D-9 ( 2022.11.8)

2학년에 올라가면서 국어학원을 몇 달 다녔는데, 영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았지. 그래서 어렵사리 과외선생님을 모시게 되었다. 주로 특목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베테랑이라고 소개받았는데, 그분과의 첫 수업이 마지막 수업이 되었지. 단 두 시간의 대면 후 너는 '중단'을 선언했지. 선생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쨍쨍 쨍 들리는 것도 신경 쓰이지만 문제를 풀라 하고 계속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불편했으며 방안에 선생님이랑 둘이 나란히 앉아서 같은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다시는 안 하고 싶다고 했어. 별 수 있나. 결국 하루치 과외비만 정산하고 마무리지었다.


학원과 과외 없이, 인강만 들으며 과연 성적이 오를 수 있을까 걱정됐어. 그러다가 큰일 난다고, 당장 어디라도 보내야 한다며 잔소리하는 지인도 있었지. 하지만 네 말을 믿기로 했다. '결과로 과정을 입증하겠다'는 그 말 말이야.

과정의 가치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성실했던 과정을 인정받는 것도 결국은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라는 것을 압니다. 마음에 드는 성적이 나오지 않게 되면 과거의 성급했던 결정을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아이를 말리지 않았던, 한 달 만이라도 해보고 결정하자고 설득하지 않았던 제 자신을 책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결과로 자신의 선택을 입증하겠다는 아이를... 지켜봐야겠습니다. (2021.06.13)

당시의 글에서 엄마는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더라. 오늘의 엄마는 그날의 엄마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때 아이를 믿어준 것, 참 잘한 일이라고 말이다.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국어 석차가 전교 309명 중 39등이었던 너는 2학년 2학기 기말고사에서 당당히 1등을 했다. 결국, 결과로 과정을 입증했다.


D-8 ( 2022.11.9)

왼쪽 머리와 왼쪽 귀 뒤, 왼쪽 목의 통증, 왼쪽 눈 충혈, 왼쪽 이마의 수포.

갑자기 시작된 이상 증세에 엄마는 대상포진을 의심했다. 하지만 돌팔이 의사는 심드렁하게 입을 벌려 목 안을 들여다보고 피곤해서, 면역력이 약해서라고 했다. 뭐 요즘 힘든 일 있냐는 위로 섞인 멘트를 날리기도 했지. 석연치 않았던 엄마는 의사를 잡고 늘어졌다.

"대상포진은 아닐까요? 여드름 잘 나는 애가 아닌데 이마에 뭐가 잔뜩 났는데..."

의사는 그저 잘 먹고 잘 쉬라는 말 외에 별말이 없었다. 다음날, 드문 드문 있던 수포는 왼쪽 이마를 잔뜩 덮었고 왼쪽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친절하고 실력 좋기로 소문난 피부과에서 두 시간 반을 기다린 끝에 만난 의사는 단번에 대상포진임을 알아봤지. 코까지 수포가 번졌으니 걱정되면 큰 병원에 갈 수 있도록 소견서도 써준다고 했다. 우리는 바로 대학병원으로 갔고 몇 주간 치료를 했어.


처음 진단을 받고 병원 앞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일그러진 네 얼굴을 보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던 그 순간이 생각난다. 온통 미안함 뿐이었다. 돌팔이 의사를 향한 원망 따위를 품을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미안하기만 했어. 겉으로 드러난 대상포진도 엄마 탓 같았고 그렇게 드러나기까지 혼자 속앓이를 했을 너의 모든 시간에 미안했지. "엄마 때문에 힘든 적 없어."라고 말해주는 네 한마디 덕에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미안했다.



D-7 ( 2022.11.10)

중국어 시험에서 어이없는 문제를 틀린 너는, 그래도 중국 유학 다녀온 OO 이보다 중국어를 잘 봤다며 좋아했어. 다른 과목에도 라이벌이 있냐고 물었더니 네가 그랬지.

"다른 과목에는 라이벌이 없어. 다른 사람 말고 나 자신이 라이벌이니까. 음하하하"

하지만 수학에서는 너 자신도 라이벌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수학에 있어서만큼은,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더 똑똑해져 있을 거니까."라며...


뼛속까지 문과에 수포자인 부모에게서 어떻게 저런 아이가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독보적인 수학 실력과 성적을 보여준 너였다. 언젠가 허공을 보면서 눈알만 움직이기에 뭐하냐고 물었더니, 수학학원 선생님이 내준 문제를 머릿속으로 풀고 있는 중이라고 한 적도 있지. 수학적으로 비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엄마는 알았다. 네가 얼마나 수학 공부에 공들였고 얼마나 오랜 시간 엉덩이를 붙이고 문제를 풀었는지 말이야. 수학 문제를 너무 많이 풀어서 지겨워 죽겠다고, 토가 나올 것 같다고 한 적도 있지.

학원에서만 그런 게 아니었어. 학교에 상담 가면 만나는 선생님마다 너를 칭찬하셨다. 수업시간에 바른 자세로 절대 졸지 않는 학생으로 유명했지. 특히 수학선생님들마다 말씀하시기를, "분명 다 아는 걸 텐데도 처음 배우는 것처럼 집중해서 듣는 유일한 학생이에요. 그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네 수학 실력의 비결은 '정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마음, 그게 전부였다.

그거면 됐다.



D-6 ( 2022.11.11)

어려서부터 '현금부자'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지갑에 늘 지폐가 두둑하게 들어있던 너였는데, 고등학생이 되어 살림에 직접적인 보탬을 여러 번 주었다. 1학년 때는 수학학원에서 장학금이라며 상품권 50만 원을 보내주셨지.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하다는 전화를 받고, 살다 보니 아들 덕에 이런 일도 경험해본다고 감격했다. 2학년 때는 외부 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았어. 생각보다 큰 금액과 장학증서를 받았는데, 공부가 가져오는 가시적인 성과가 너에게 자극이 된 것 같았다.

2학년 말, 인강 업체가 정해놓은 조건을 충족하고 환급대상 대학에 합격하면 52만 원 전액을 장학금으로 돌려준다는 환급형 수강권을 구입한 너에게 '환급'은 또 하나의 목표가 되었다. 3월, 6월, 9월 모의고사 성적 등록과 수시 정시 모의지원이라는 조건은 충족했고 수능성적 입력과 대학 합격이라는 두 개의 조건 충족만이 남았지.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환급 조건은 결국 합격이구나.


어떤 이는 손에 닿는 족족 깨지고 사라져서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불리는데, 너는 손에 닿는 족족 생기고 불어나는 진정한 '마이더스의 손'이다. 그 손 덕에 공부와 입시를 치르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 재미가 붙었구나.

이제 우리는 즐기기만 하면 된다. 푸는 족족 정답이 될 것이고 지원하는 곳마다 합격할 것이며 결국, 환급받을 것이다.


*덧 : 각 챕터의 이름은 수능 금지곡 제목입니다.

수능 전에 들으면 수능 시험날 온종일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곡들이죠.

그 곡들의 제목을 상기시킴으로써, 금기에 과감히 맞서겠다는 엄마의 의지입니다.



빨간 맛 - 레드 벨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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