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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Nov 11. 2019

D-100 프로젝트 < D-48 >

< 통곡할 만한 자리 >

조선시대의 문인인 박지원이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면서 쓴 열하일기.

그중 7월 8일 자 일기에 후세 사람들이 붙여준 제목이 '통곡할 만한 자리'이다. 청나라를 여행하다가 넓게 펼쳐진 요동 지방의 벌판을 보고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자리로구나..."라고 한 말에서 유래했단다.

광활하게 펼쳐진 중국 벌판을 보며 벅차오른 감동을 '울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슬플 때만 울음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칠정', 즉 희로애락 애오욕이 극에 달하면 통곡하게 되어있다는 발상...

'울음'에 대한 관조가 도드라지는 글이다.


'난 어떤 감정들이 극에 달하지 못해 통곡하지 못하였는가...'

'분명 울음이 날것이라고 예상한 순간조차 울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왜였는가...'

'통곡할 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한 것일까...'

나 역시 '울음'에 대한 관조를 한 날이었다.


첫 번째 울음 미수는,

벗들이 야심 차게 기획, 준비한 서프라이즈 선물 증정식.

수업을 마치고 퇴근하던 나를 기다렸다가 수능 응원 선물을 잔뜩 건네주었다. 그녀들은 아침부터 모여 선물을 사러 돌아다니고 편지를 쓰고 선물 포장지를 골라 정성껏 포장을 했다. 특별 주문 제작한 고로케 속에는 든든한 '용돈'을 숨겨 두었다. 우르르 몰려와 '짜잔~~~'하고 선물을 내밀었는데...

난 "아이고~~ 뭐야~~~ 이런 건 왜 또~~~"라는, 내가 생각해도 참~~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뒤늦게 합류한 벗이 "유정이 울었어?" 묻는데, "아... 나 울었어야 하는 거야?"라며 하하하하 웃었다.

분명 가슴은 뜨거워졌고 목구멍은 간질간질해졌지만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종종거렸을 그들의 바쁨이 눈에 그려져 너무 고마웠고, 다 같이 한번 모이기 힘든데 겨우겨우 시간을 맞췄을 그 정성에 미안함이 그득했는데,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두 번째 울음 미수는,

둘째 아이의 낙방 소식.

중3인 둘째 아이는 올 한 해를 오롯이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 쏟아부었다. 서류를 접수하고 1차 합격 소식을 기다린 것도 두 번, 시험과 면접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한 것도 두 번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2차에서 떨어졌다는 결과를 접한 것도 오늘로 두 번이 되었다.

"많이 속상하지?"라고 묻자 씩 웃으며 "그닥?"이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친구들과 위로연을 한다고 나가버렸다. 감정의 기복도, 표현도 크지 않은 아이라서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인다.

'까짓것 일반 고등학교 가면 되지, 이게 다 경험이지, 이 경험 살려서 고등학교 가서 잘하면 되지~'라고 내 맘을 먼저 위로했지만  아쉬움과 답답함은 점점 머리 꼭대기로 차올랐다. 이제 곧,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입에서는 통곡이 나올 것만 같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

날 위해 쉼 없이 맘 써주는 동무들이 있어 기뻤다.

더 좋은 교육환경을 주지 못해 결과가 좋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남편과, 그걸 부정할 수 없는 나에게 노여운 맘이 생겼다.

계속되는 도전에도 성공의 단맛을 보지 못한 아이를 보는 것이 슬펐다.

긴장되고 여러 가지 신경 쓰는 일이 많은 나를 웃게 해주는 벗들이 있어 즐거웠다.

실패 앞에서도 의연하려고 애쓰는 작은 아들과, 그런 동생의 맘이 한없이 괴로울 것임을 전해주는 큰 아들이 사랑스러웠다.

지덕체를 겸비한 훌륭한 인재를 알아주지 못한 그 학교가 미웠다.

이제 모든 액땜은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성공뿐이리라 욕심을 부려보았다.


각각의 감정들이 서로 자기가 더 중하다고 악다구니를 벌였나 보다.

그러느라 어느 감정 하나 '울음'에 미칠 만큼 가득 차오르지 못했나 보다...

아니면, 아직은 통곡할 만한 '시간적 자리'가 아니었나 보다.

아직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때까지는 어떤 감정의 독주도 용납되지 않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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