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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Feb 17. 2023

갱년기 남편과 살고 있습니다

남편의 이상이 감지된 것은 2020년 여름이었습니다.     

갑자기 죽고 싶다고 하더군요.     

처음이었습니다. 울분을 토하며 미친 사람처럼 분노를 드러낸 게.      

분명 저를 향한 분노는 아니었는데 너무 힘들고 불편했습니다.      

          

믿었던 정당에 대한 배신감, 짓밟힌 신뢰에 대한 분노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게 그 분노를 쏟아내는 게 의아했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반복되고 이전과 다른 남편을 발견하면서 조심스레 떠올리게 됐습니다. 남자들의 갱년기를요...               

검색창에 '남성의 갱년기'를 입력하면 갱년기 자가진단 항목이 나옵니다. '대한 남성과학회, 남성갱년기학회'라는 이름도 줄줄이 따라오더군요.     

1. 성적 흥미가 감소했다.
2. 기력이 몹시 떨어졌다.
3. 근력이나 지구력이 떨어졌다.
4. 키가 줄었다.
5. 삶의 즐거움을 잃었다.
6. 슬프거나 불안감이 있다.
7. 발기의 강도가 떨어졌다.
8. 최근 운동할 때 민첩성이 떨어졌다.
9. 저녁식사 후 바로 졸린다.
10. 최근 일의 능률이 떨어졌다.      

3개 이하로 선택했지만 선택 항목 중에 1번이나 7번에 '예'를 선택했다면, 혹은 1번과 7번 외의 항목 중에 3개 이상 '예'를 선택했다면 남성 갱년기입니다.                     (출처 : 대한남성과학회)          


제가 본 남편의 상태라면, 7개더군요. 본인은 극구 부인할 몇 가지 항목을 제외하더라도 최소 4개는 돼 보이니... 갱년기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옥 같던 그 해의 여름이 끝날 무렵, 남편의 얼굴 한쪽이 마비되었습니다. 달리의 작품 '기억의 지속'에 나오는 시계처럼 달리기를 멈추고 녹아내리던 그의 얼굴에는 저의 지분도 있었습니다. 구안와사라고도 불리는 그 증상이 있기 전까지 남편과 저 사이에는 약간의 갈등, 묘한 거리감, 알듯 모를듯한 긴장감이 있었죠. 솔직히 말해, 그 인간이 미웠습니다. 괜한 짜증, 분노, 날카로움, 예민함이 점철돼 저에게만 쏟아붓는 것이 못마땅했죠. 하지만, 일그러진 얼굴은 모든 것을 수렴해 버렸습니다. 직전까지 그에게 가졌던 불만은 '이해'라는 이름으로 묻어두게 됐고 미움은 연민으로 탈바꿈해 버렸습니다. 손해 보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20년간 지켜왔던 결혼 생활이, 잘생긴 남편의 얼굴이, 현명한 아내라는 타이틀이, 아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큰 비는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안면마비와 함께 남편의 투정이 심해졌습니다.      

입시를 앞둔 큰아들의 고기반찬을 질투했고, 한의원에서 조심하라고 일러준 음식을 아내가 철저하게 지키는지를 감시했습니다. 자신을 챙겨주는 친구들의 관심을 제게 끊임없이 어필했고 부족한 아내의 관심을 한없이 갈구했죠. 그래요.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아프니까요.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해가 바뀌고, 병원에서는 85% 이상 회복이 되었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까칠하고 짜증이 잦더군요. 분명, 예전과는 달라 보였습니다. 안면마비를 핑계로 어리광을 부린다고 하기엔 너무 오래 끄는 감이 없지 않았고, 저도 이제 슬슬 지쳤죠. 뭔가, 다른 이유가 필요했습니다. 남편의 지속적인 짜증, 정색, 비난적인 어조, 까탈스러움을 설명할 '그것' 말이죠.          

     

전, 그것을 '갱년기'라 명명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남편이 덜 미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본디 성품이 착하고 온화한 사람인데 갱년기라는 병에 걸려 달라진 것뿐이라고요. 사춘기 자녀를 둔 엄마의 심정과 같습니다. 아이들의 사춘기를 겪을 때 수없이 자기 쇠뇌를 했습니다. '그들은 원래 내 뱃속에 열 달을 품어 지극 정성을 다한 생명체이고 더없이 소중하지만 사춘기라는 병에 걸려 엄마를 원수로 알게 됐고, 상처 주는 말을 기가 막히게 알아내 쉼 없이 공격하는 중이다.'라고요. 환자라고 생각하고 이해하려 노력했죠. 그랬더니 갈등도 줄고 관계도 좋아지더군요. 갱년기의 남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원래는 하늘 아래 둘도 없이 나를 사랑하고 챙겨줬던 사람이지만 갱년기라는 병에 걸려 지밖에 모르고 세상 우울하면서 까칠한 사람이 돼버렸다구요.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제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습니다. 툭 던지는 한마디와 무심코 보이는 눈빛 하나로도 충분히 움츠러들고 상처받더군요. 아직 저에게는 갱년기가 오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둘 다 갱년기라면 대책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불행해지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비위를 맞춰 보기도 하고, 뒤돌아 욕도 해봤지만 해소되지 않는 갈증, 그것을 글로 풀기로 했습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누군가처럼요. 그러다 보면 제 맘도 조금은 후련해질 테고, 갱년기 남편을 이해할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일단 브런치 대나무 숲에서 크게 외쳐보렵니다.     

"저희 남편은 갱년기예요~~~ 그런 것 같아요~~~ 뭔가 달라졌어요~~~"



* 브런치에 만들었던 부캐 계정에 썼던 글입니다. 최근 그 계정을 폭파하였고, 늘봄유정의 이름으로 재발행합니다. 기시감이 드신다면, 거기서 보셨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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