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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Feb 19. 2023

양말에 진심인 편

며칠 전이었습니다.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이 갑자기 제게 물어왔습니다.     

"이 양말 당신이 산 거야?"     

손으로는 자신이 신고 있는 양말을 가리키고 눈에는 잔뜩 힘을 주었으며 목소리는 날카로웠습니다. 누가 봐도 싸움 거는 사람이었죠. 게다가 그가 던진 질문은 방향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분명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생겨 따지고자 하는 분위기인 건 알겠는데, 도대체 듣고 싶은 대답이 뭔지 쉽게 추측이 되지 않대요?  

    

일단 그건 새양말이 아니었습니다. 요 몇 달 동안 계속 신고 다니던 회색 스포츠 양말이었거든요. 복장 자율인 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청바지나 면바지를 주로 입기 때문에 신사양말보다는 캐주얼 양말을 많이 신습니다. 가끔씩 달리기도 즐기니 스포츠 양말도 구비해놔야 하죠. 그렇다고 신사양말이 없다면 그건 또 안될 말입니다.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날도 가끔 있기 때문이죠. 남편의 서랍에는 스포츠 양말, 신사 양말, 일반 캐주얼 양말이 모두 구비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회색 스포츠 양말을 신어놓고 갑자기 불평을 하는 겁니다.               


아무튼, 그날 남편이 신은 양말은 늘 신던 거였고 그날의 복장은 면바지였습니다. 그런데 대뜸 그 양말이 내가 직접 사서 놓은 것인지 궁금해했던 겁니다.     

"그럼. 내가 산 거지 왜?"     

"양말이... 참 뭐가 안 맞는다. 이 바지에 이런 양말을 신어도 되는 건지 원! 참!"     

틱틱거림. 맞습니다. 그건 틱틱거림이었습니다. 툴툴거림을 훨씬 상회하는...      

아침 눈뜨자마자 제대로 한방 얻어맞은 저는 남편 출근 후에도 계속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양말 그게 대체 뭐라고 아침부터 아내에게 시비인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죠. 갱년기면 하찮은 양말 하나에도 짜증과 분노가 솟아오르는 걸까. '이 맘에 드는 양말을 당신이 산거냐, 누가 준거냐, 이 양말이 이 복장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빈정거림이 오전 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남편이 출근도 뒤로 하고 제 뒤를 쫓아다니며 계속 중얼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알고 보면 남편은 원래부터 양말에 진심이었습니다.      

패완얼? 아니요. 남편이 생각하는 '패션의 완성은 양말'이었습니다. 반바지에 회색 신사양말을 힘껏 올려 신은 아저씨들을 경멸했지요.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을 때는 하얗고 발목이 짧은 스포츠 양말을 신거나 맨발인 듯 보이지만 발이 허전하지 않게 감싸주는 페이크 삭스를 신었습니다. 정장을 입을 때는 까맣고 정갈한 신사 양말을 신었고 면바지나 청바지에는 독특한 무늬가 박힌, 다소 개성적으로 보이는 캐주얼 양말을 신었습니다. 발에 땀이 워낙 많이 나기 때문에 양말에 관심이 많아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름이면 양말이 홀딱 젖어버려서 여벌의 양말을 들고 다니다가 중간에 갈아 신어야 발 냄새가 덜났으니까요.     

           

양말이야말로 아내의 관심이 닿는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아이들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어도 남편에게 관심이 있는 아내라면 최소한 양말 정도는 챙겨야 한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발가락 부위에 구멍이 난 양말, 발 뒤꿈치 쪽이 닳아버려 신고 나갔다가는 수시간 안에 사단이 날 것 같은 양말. 그것들은 빨고 말리고 개는 과정에서 사전 검열로 다 잡아냈지만 남편이 가진 하의에 어울릴만한 양말을 다양하고 완벽하게 구비해놓지 못한 아내에게 그렇게 섭섭했던 걸까요? 열 번 잘해도 한번 못하면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남편의 양말에서 구현될 줄이야... 물론 열 번을 모두 완벽하게 잘 해낸 아내였는지, 반성이 들긴 하지만요.               


답답한 마음에 검색을 하다 보니 양말에 진심인 기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2014년 5월 31일 동아일보 기사였는데, 아저씨들의 양말 사랑을 꽤 분석적으로 서술하고 있더군요.     

기사의 요지는 이랬습니다.      

과거와 달리 요즘 남자들의 자기표현 욕구가 강해졌고 복장에 대해 유연하진 기업 문화로 인해 양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명품백이나 시계 같은 고가의 물건 대신 부담 없는 가격으로 실속 있게 작은 사치를 부리는 행복을 양말이 전해준다. 양말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자 반복되는 일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해방구이며 재미이다. 하나에 2,500원 하는 마카롱이 유행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남자에게 양말은 작은 사치다.

뜨악! 남자들은, 아니 남편은 양말에 진심이었구나... 갱년기 남편의 두서없는 짜증이라고 몰아세울 수 없는 거였구나...                


당장 인터넷 쇼핑몰 앱을 열었습니다. 화려하고 예쁜 양말들이 가득한 화면을 보다가 창을 닫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쇼핑몰로 직접 가서 말끔한 신사양말과 알록달록한 양말을 잔뜩 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의 양말 서랍을 열어보니 어찌나 초라하고 구질구질하던지요. 쓸만한 것들만 최소한으로 남겨둔 후 새 양말로 채워놓았습니다. 남편이 타박하던 회색 스포츠 양말은, 버리기엔 너무 새 거라서 일단 제 옷장 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습니다.

             

다음날,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이 양말 서랍을 보고 발그레한 표정으로 제게 달려왔습니다.      

"양말 새로 다 산 거야? 에이... 내가 주문하려고 했는데..."     

진심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양말에도 진심이고 기쁜 마음도 진심.      

갱년기 남편의 투정이라고 여기며 꼴 보기 싫었는데, 지금까지 맘에 안 드는 양말도 꾹꾹 참으며 신고 살아왔던 그의 세월이 불쌍해졌습니다. 맘에 안 드는 양말을 신고 나가 하루 종일 꿀꿀한 기분을 달고 있었을 그. 얼마나 인생이 보잘것없게 느껴졌을까요...                

측은지심도 잠시. 남편이 한마디 거듭니다.     

"페이크 삭스는 이렇게 밋밋한 거 사면 안돼. 난 발에 땀이 많아서 이런 거 신으면 발이 신발 속에서 미끄러진다고. 골지로 된 걸 사야 돼."     

어이구... 이쯤 되면 양말로 논문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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