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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01. 2023

친밀한 이방인으로 살아가기

< 친밀한 이방인 - 정한아 >

아이들의 모교에는 <책울림>이라는 학부모 독서동아리가 있다. 2017년, 학부모회장을 맡았던 내가 만들었고 지난해까지 운영을 도맡아 했던, 각별한 애정과 관심이 남아있는 동아리다. '졸업생 학부모도 참석 가능'이라는 관대한 조건이 있었지만 졸업생 학부모가 학교를 다시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동아리모임이 있는 셋째 주 월요일마다 공교롭게도 수업이 있었다. 매달 동아리장에게 "이번달에도 힘들게 됐다..."는 문자를 남겨야 했다. 그러다 모처럼 시간이 맞아 참석하게 됐다. 늘 여섯 명 남짓하던 독서모임의 회원은 열 세명으로 두 배 이상 불어나 있었다. 뭉클했다.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았으며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나의 작품...


...

9월의 책은 OTT 드라마 < 안나 >의 원작이기도 한, 정한아 작가의 < 친밀한 이방인 >이었다.

< 친밀한 이방인 > 은 이름, 학력, 직업, 심지어 성별까지도 가짜로 꾸며 살게 된 어떤 여자의 이야기다. 그녀의 거짓말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 때문인지, 소통이 힘들었던 부모 때문인지, 자신을 유린했던 고등학교 교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유가 무엇이 됐든 그녀의 거짓말은 과감하고 지나쳤으며 아슬아슬했다. 그녀가 만든 모든 캐릭터의 결말은 '잠적'일 수밖에 없었다. 발가벗겨져 조리돌림당하기 전에 사라지기. 거짓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지만 그것으로 이익을 취한다면 그것은 사기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녀는 그저 사기꾼이었다. 명문 여대 편집기자로, 피아노과 교수로, 요양병원 의사로, 작가로 살면서 부와 명예를 누린다. 그리고 사라진다.


거짓 삶을 살지만 사람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친절하고 진심이었던 이유미였다. 상냥하면서 차분하면서 경박스럽지 않은 말투, 말하기보다는 듣는데 집중하는 태도로 어느 곳에서든 잘 어울렸고 누구에게서든 환영받았다. 그녀를 쫓아가며 독자는 내내 자신이 쓰고 사는 가면을 떠올리게 된다. 작중 화자 역시 그랬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자신을 직시하게 된다. 위선자를 보며 진실을 떠올리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


이유미와 공모해 어머니를 속여 자신의 진짜 삶을 찾게 된 '진'이라는 인물은 이렇게 말했다.

한때 저는 제 앞의 모든 길이 막혀있다는 생각에 주저앉아버린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가 나타나 다른 길을 열어준 이후, 막힌 벽 너머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제야 비로로 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미래와 꿈에 대해, 그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죠. 한 번도 나 자신으로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사기든, 모략이든 술수든, 그걸 무슨 말로 부르든 간에, 어쨌든 저는 그로 인해 삶을 처음부터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먹고, 마시고, 손을 잡고 잠드는 게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지요. 그게 바로 엠(이유미, 이유상)이 저에게 준 선물이에요.
(p247)

이유미는 주변인에게 그런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거짓된 삶을 이용해 타인들이 각자의 삶을 투영할 수 있게 해주고,  자기 객관화의 시간을 갖게 되면 홀연히 떠나버리는 이방인. '진짜 나'가 없는 삶이 바로 '나'인, 그런 사람. 모두의 구원자.


...

독서모임에서 나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 시간의 주인공은 졸업생 학부모인 '나'가 아니라 재학생인 그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두 시간 가까이 그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학부모 독서모임은 늘 '바람직한 부모상'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라, 아이들이 거짓된 삶을 살지 않으려면 자존감을 지키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왜 한 마디도 하지 않느냐면 마무리 발언을 해달라는 요청이 내게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부모라는 존재 역시 '친밀한 이방인'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들의 삶에 너무 가까이 개입해서는 안되지만 우리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갈 길을 스스로 알 수 있도록 적절한 거리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요."


그날의 독서모임 도중 나는 문득 각성을 했다. 이제 이 책모임은 나의 작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야말로 친밀한 이방인이리라.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켜왔던 사람이라서 친밀하지만 바뀐 주인공들을 위해 더 이상의 개입을 거두고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야 하는 이방인...


책도, 시간도 귀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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