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Jan 18. 2024

모든 책은 정치학 책이다

2년 전, 책 모임 하나를 시작했습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대학 동기들과 정치 관련 책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 - 독재부터 촛불까지, 대한민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를 첫 책으로 야심 차게 시작했는데 2년이 지난 최근 1월 독서 모임 책은 호프 자런의 에세이, < 랩 걸 >이었습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나라 정치는 도대체 왜 이 모양 이 꼴인 거냐, 희망은 있는 것이냐는 물음에서 시작한 우리는 한국 정치의 현대사를 다루거나 우리나라가 직면한 문제, 세대 갈등을 다룬 책을 읽었습니다. 읽다 보니 정치란 인간의 마음을 얻는 일인데 과연 마음이란, 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싶어졌고 융 심리학에 관한 책을 두 권 읽었습니다.

인간의 심리와 문명의 발전에 '환경'이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에 <총, 균, 쇠>를, 왜 인간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느냐는 고민에서 <사람, 장소, 환대>를, 그럼에도 배타적인 감정보다는 다정함과 환대가 생존에 유리한 자세라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었습니다.

역사와 과학을 이해하는 것이 인간과 정치를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는 생각에 <사피엔스>와 <코스모스>,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종의 기원>을 읽었습니다. 무엇 하나 정치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책은 없었습니다.


중간중간 머리를 식히자며 읽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스토너>는 '사람'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는 문장으로 기억되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결국 '사람'에 대한 애정이 삶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이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였지만 사람을 향한 애정 때문에 이념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되었다는 이야기로 이해하니, 우리나라 정치판에는 '사람'이 빠졌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념이라고 포장된 이권만 보였습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질문을 던진 <스토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매 순간에 열정을 다한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과는 상관없이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환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존재가 아닐지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삶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정치는 무엇을 해주고 있나, 무엇을 했어야 하나 잠시 사색에 잠겨보기도 했습니다.


1월 선정 도서였던 < 랩 걸 >은, 여성이자, 순전히 호기심에 이끌려 연구하는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자로서 저자가 겪어야 했던 비주류의 삶과 그 성장 과정을 저자의 연구 분야인 나무의 성장 과정에 빗대어 서술한 에세이입니다. 작가의 일상 이야기 사이 사이 나무에 대한 설명이 나올 때마다 나무의 삶에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는 통찰을 건질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경고합니다. 나무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수십 년 동안 식물을 연구한 후 나는 결국 그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결국 이전보다 더 깊이 그 사실을 이해하고 끝날 운명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깊은 의미에서 식물과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식물에게 투영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마침내 우리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인식하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 랩 걸 p399 >


정치를 공부하면 문제를 해결할 묘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지에서 온 오만이었습니다. 정치학을 배우던 시절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나이가 들며 삶을 살아내다 보니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몰랐습니다. 정치 관련 책에서는 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역사, 과학, 심리학, 소설책을 읽다 보니 차라리 마음이 놓였습니다. 애초에 답은 없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수만큼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구성된 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중재해 보겠다고 모인 이들조차 각자의 욕망과 이기심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니 누가 해도 불만족스러운 것이 정치가 아닐까.

우리나라 정치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 해결책을 생각해 보겠다는 되지도 않는 포부를 갖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라도 제대로 있는 눈을 갖기 위해 읽고 읽는 것만이 시민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무슨 책이든 그 안에 들어있는 정치를 찾아내 현실의 그것을 알아내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