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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Feb 16. 2024

행주란 모름지기, 자고로, 무릇

라라크루 화요 갑분글감

⭕ 라라크루 [화요갑분: 화요일의 갑분글감 글쓰기]_2024.02.13.

[주방용품]

컵, 그릇, 접시, 대접, 채반, 도마, 수저, 수세미, 식기세척기, 퐁퐁, 고무장갑, 키친타월, 크린백, 냄비받침, 음식물쓰레기 + 기타 주방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사길 참 잘했다, 돈이 아깝지 않다며 나를 칭찬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다른 집에서는 이불 건조대로 쓴다는 실내 자전거나 반품 샵에서 만 원에 가져왔는데 아침마다 열일하는 달걀찜기가 그렇다. 둘 다 십년지기들이다. 비슷하게 오랫동안 이쁨 받는 주방 소형 가전 하나가 있다. 행주 삶는 기계다.


다양한 재질과 색상의 행주가 많지만, 난 하얀색 면으로 된 행주를 고집한다. 행주란 모름지기, 자고로, 무릇 하얗고 뽀얘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가스레인지에 흘러넘친 국물이나 식탁 위에 떨어진 잔해들을 닦아내면 금세 더러워지고 행주 전용 비누를 묻혀 벅벅 문질러도 처음의 백색을 유지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행주는 흰색이어야 한다. 그래야 오물의 양과 질을 한눈에 가늠할 수 있고 행주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시켰다는 만족감이 커진다.


더러워진 행주를 들통에 넣고 표백제를 넣어 푹푹 삶을 때의 희열, 빳빳하게 잘 마른행주에서 나는 햇빛 냄새가 좋았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들통에서 거품이 넘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행주를 삶곤 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바로 행주 삶는 기계였다. 행주 네댓 개와 물, 과탄산소다를 넣고 버튼만 눌러주면 20분 동안 작동하고 알아서 꺼졌다. 넘치는 일도 없었고 지켜보며 서있지 않아도 됐다. 이토록 만족스러운 가전과 십여 년을 함께 했으며 여전히 문제없이 잘 쓰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고장 나 버리면 대체제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제품은 단종된 지 오래고 비슷한 제품도 없다. 행주 삶는 가정용 전자제품을 만드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다. 수요가 없는 제품이니 만들지 않겠지만, 나로서는 참 아쉽다.


흰 행주와 행주 삶는 기계.

이 둘은 내가 가진 집착과 강박의 다른 이름이다. 아직도 내려놓지 않은 많은 것들의 대명사다. '모름지기, 자고로, 무릇'이라고 시작하는 문장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다른 행주를 인정하지 않는 나는, 행주를 기계에 삶지 않으면 세상이 두 쪽 날 것 같은 내 마음은 얼마나 그악스러운가.


행주를 삶는다.

뽀얗게 삶아진 행주를 탁탁 털어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 가지런히 넌다.

겨울비 내리는 대낮, 햇빛 한줄기 찾을 수 없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거 아닌 물건, 이상한 포인트에서 고집을 부리던 내가 창문에 비친다.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화요갑분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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