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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Feb 20. 2024

생일에는 샤넬백 대신 검정 봉다리

라라크루 화요갑분글감 <가방>

뭐 갖고 싶은 게 없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제일 난감하다. 양자역학이 뭐냐는 질문만큼이나 머릿속이 하얘진다. 딱히 갖고 싶은 게 없다고 얼버무리지만, 하얘진 줄 알았던 머릿속은 사실 위시리스트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상대의 부담을 고려해 물욕이 없는 척했을 뿐이다.


생일 선물로 뭘 갖고 싶냐고 묻는 가족들의 질문도 그러하다. 눈치껏 금일봉을 주면 좋으련만 싶다가도 돈으로 받으면 흐지부지 생활비로 쓰일 것이 빤해 그만둔다. 욕심대로 말할까 하다가도, 최저시급 받아 가며 서빙하는 작은 아들, 입시 시즌에만 7만 킬로 운전했다는 큰아들, 가장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버거울 남편을 생각하면, 사람이 어떻게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사냐며 마음을 접는다. 그렇다고 생일을 축하받고 싶은 마음마저 접지는 않는다. 동거인으로서, 세상 함께 살아가는 동지로서 서로의 존재를 귀히 여기고 축하해 주는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은 표현해야 상대가 알 수 있다는 것을 남편과 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명품 로션을 사달라고 했다. 평소 쓰고 있는 제품인데 3분의 1정도만 남았다. 내가 부리는 최고의 사치일뿐더러 내 몸에서 올라오는 향기로 하루 종일 좋은 기분을 만들어주는 만족도 최상의 소비 제품이다. 그래봐야 66,000원. 남자 셋이 2만 원 남짓씩 모으면 되니 부담이 적다. 게다가, 흰 바탕에 브랜드명이 고딕체로 쓰인 종이 봉투에 담겨오니 선물의 액면가와는 상관없이 기분이 좋다.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행복해지는 선물이다.



생일 아침에 일어나니 현관 장식장 위에 검정 봉다리 두 개가 놓여있었다. 봉지 밖으로 삐죽이 존재를 드러낸 것은 미역이었고 그 안에는 불고깃감과 국거리 소고기가 들어있었다. 새벽 3시쯤 인기척을 내며 귀가한 아들이 사 들고 온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생일 아침상을 차리겠다는 아빠와의 비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아들은 쿨쿨 잠들어버렸지만... 냉장고에 넣지 않은 고기가 냉기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샤넬 백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명품 검정봉다리가 아닐 수 없었다.


큰아들은 아침상 대신 점심상을 준비했다. 미역국과 불고기가 제법 근사한 맛을 냈다. 본인도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는지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아들이 요리하는 동안 나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괜한 참견으로 김빠지게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국간장 대신 양조간장으로 간을 했지만 미역국은 깊었으며, 쪽파인 줄 알고 부추를 넣었다지만 불고기의 비주얼은 괜찮았다.

작은아들은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회를 사줬다. 우리 집 최고 부자답게 원하는 걸 뭐든지 사주겠다며 백화점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작은아들은 돈 많은 애, 언제든 뭐든지 다 사주는 애라고 나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아들의 지갑이 당연히 내 것인 양 생각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큰 케이크를 사겠다는 남편과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작은 조각 케이크 하나에 꼬마 양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기 때문이었다.


딸로 와줘서 고맙다는 부모님의 메시지와 맛있는 것 사 먹으라는 시어머님의 용돈, 가족들이 차려준 생일상, 지인들의 축하 문자로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날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낳아주신 부모님이, 며느리 사랑 가득하신 어머님이, 엄마와 아내를 향한 관심과 애정 가득한 가족들이, 살뜰히 챙겨주는 지인들이 더 귀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명품백 대신 명품 같은 사람들이 가득한 날. 매일이 생일이었으면 좋겠다.


백종원 쌤의 가르침을 받아 간장불고기 고추장불고기 동시에 해냈다.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화요갑분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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