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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Feb 06. 2024

으른이 된 아들

< 라라크루 갑분글감 - 화면 >

서울, 충주, 대전, 진천, 제천, 천안, 안성....... 'OOO체대입 학원 입시 1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아들이 수험생들을 데리고 1월 한 달 동안 다닌 입시 장소다. 그나마 올해는 막내가 아니라서 경주는 안 가도 된다고 안도한 아들. 그 놀기 좋아하는 녀석이 한 달 동안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고 퇴근하자마자 밥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제자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아들도 바짝 긴장했던 것이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아이들을 픽업해 입시가 치러지는 학교에 데리고 간다. 실기장으로 들어가기 전 꽁꽁 언 아이들의 몸을 운동으로 녹여주고 바짝 긴장한 마음을 함성으로 풀어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이들을 기다리며 차 안에서 시간을 죽인다. 실기를 망쳐서 속상한 아이, 생각보다 기록이 잘 나와서 만족스러운 아이, 다음날 실기가 걱정인 아이, 실기가 다 끝나서 후련한 아이. 온갖 감정이 혼재된 차 안의 공기를 아들은 어떻게든 정돈하려고 했을 테다.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을 테고, 때로는 꼰대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했을 것이며 신나는 음악을 크게 틀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랬다. 추측이 아니다. 입시학원 SNS 화면 목격담이다. 


아들의 SNS 계정을 팔로잉하지는 않아서 사생활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일하고 있는 입시학원 계정에 들어가면 바쁘게 돌아가던 수시, 정시 시즌의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들은 수험생들을 실기장에 들여보내기 전 각 학교의 상징물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어주었다. 거기에 "마지막도 불태우고 와라!!" 같은 응원의 문구를 담아 SNS에 올렸다. 

운전하는 아들을 학생들이 찍어 올린 짧은 영상 화면에는, 크게 음악 소리에 둠칫둠칫 박자를 맞추는 아들의 뒷모습이 담겨있다. 애들 태우고 다니는데 항상 운전 조심해야 한다는 엄마의 잔소리가 무색해 보이지만, 저것도 나름의 사회생활이겠거니 했다. 

틈틈이 제자들의 졸업식장도 찾았다. 인근 십 수개 고등학교의 졸업식을 다 돌아다녔다. 점심 무렵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 아들이나 제자들이나 다 검은 패딩을 입은 아가들이다. 아들은 자신과 별 차이 없는 고만고만한 녀석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는 거였다. 


기껏해야 저보다 서너 살 어린 동생들을 12인승 승합차에 태우고 학원 셔틀을 돌기 시작한 것이 제대 직후다. 꼬박 1년을 그렇게 살았다. 2학기에는 복학까지 해서 주독야경의 생활을 이어갔다. 학점은 아쉬웠지만 출석은 열심히 했고 과제도 꼬박꼬박 제출했으며 시험도 제대로 봤다는 게 스스로 뿌듯하다고 했다. 등록금은 부모에게 신세를 졌지만 제대 후 줄곧 용돈은 제 손으로 벌어 쓰고 있는 것도 장하다. 어느덧 자신의 삶은 자기가 책임지는 어른이 된 것이다. 


아들이 제법 어른 같다고 느끼는 순간은, 집에 올 때 먹을 것을 사 올 때다. 엄카가 아닌 자기 돈으로, 혼자 먹기 위함이 아니라 가족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얼마 전 합평회가 있던 날 저녁을 못 챙겨놓고 나왔는데, 큰아들이 사 온 초밥과 닭강정으로 식구들 저녁을 해결했다. 

아들이 대전 모대학 실기장에 갔던 날, 전화가 왔다. 유명한 빵집에 들를까 하는데 뭐가 먹고 싶냐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줄 선다는 딸기 가득한 케이크는 힘들겠지?"라고 무심코 말했는데 아들은 줄 서서 케이크를 사 들고 왔다. 양손에 빵 봉지를 가득 들고 집으로 들어서는 모습은, 어렸을 때 이라크 건설 현장에서 몇 년 동안 일하고 오신 아버지가 귀국하시던 모습을 닮았다. 위풍당당, 행복가득. 

줄이 끝도 없이 길고 대기 번호가 32번이었는데 두 번째로 호명됐다, 명란 바게트가 품절됐다고 해서 돌아서 나오는데 마침 스무 개가 새로 나와서 살 수 있었다, 등 빵 전쟁터에서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우리 먹을 것만 사 오지 말고 간 김에 원장님이랑 동료 선생님들것도 사 오지 그랬냐고 하니, 이미 사서 돌렸다고 했다. 여유 있게 사서 실기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과도 나눠 먹었단다. 더 이상 내가 관여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른이었다. 


케이크가 너무 커서 동생네까지 전해졌는데, 큰아들과 여덟 살 차이인 조카가 감동하며 말했다.

"오빠는 이제 진짜 으른이네요?"


으른. 

자기 몫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여러 방면에서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자신뿐 아니라 주변까지 살필 줄 아는 사람. 나보다 한참이나 어려도 배울 점이 많고 감동을 주는 사람. 


SNS 화면에서 보는 나의 으른, 나의 아들이 반갑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겁게 살고 있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다만 가끔 꼰대 같은 말을 할 때는 어이없어 웃음이 난다. 

"요즘 애들은 간절함이 없어. 헝그리정신이랄까? 그런 게 없어. 우리 때보다 운동을 너무 못해."

화면으로만 만나자, 나의 으른.


아들이 업로드한 입시학원 SNS 화면.





⭕ 라라크루 [화요갑분: 화요일의 갑분글감 글쓰기]_2024.02.06. [화면]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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