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내리기"
"양변기 틀기"
친정 화장실에 붙어있는 문구다. 변기 왼쪽 벽에 붙어있는 휴지걸이와 변기 뒤편 거울에 써 있다. 화를 내는 것 같은 글씨체를 볼 때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애매한 신경전이 펼쳐지는 장소에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침잠이 많은 어머니가 새벽 두 시경 싸놓은 샌드위치를, 새벽잠이 없는 아버지가 다섯 시경 드시고 출근한다. 아버지가 출근한 지 한참이 지나면 어머니는 잠에서 깬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평온한 아침이었다. 잠에서 깬 어머니는 화장실에 갔다. 내려진 변기 뚜껑을 위로 올리고 볼일을 보려는 순간, 아직 제대로 뜨지 않은 눈에도 흉측한 것들은 가득 담겼다. 바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샤워부스로 들어가 헛구역질을 했다. 변기 물을 내리며 또 한 번 욕을 쏟아냈다.
"아니 젠장. 아침밥 잘 먹고 이게 무슨 짓이야?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나, 아니면 노망이 났나? 큰일을 보고 물을 왜 안 내려 물을? 이놈의 영감탱이 들어오기만 해 봐라!!!"
어머니는 퇴근한 아버지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부정하던 아버지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어머니는 평온한 아침을 되찾았다. 하지만 얼마 뒤, 긴장의 끈을 놓았던 어느 날 어머니는 못 볼 꼴을 또 보고 말았다. 안 되겠다 싶었던 어머니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작은 종이 위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물. 내. 리. 기.
한 장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한 장 더 썼다.
양. 변. 기. 틀. 기.
그걸 화장실 어디에 붙여놓아야 아버지의 실수를 방지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변기에 앉았을 때 잘 보이는 휴지걸이에 하나,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고 돌아섰을 때 잘 보이는 선반장 거울에 하나를 붙였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이후로도 몇 달에 한 번씩 아버지는 실수를 한다. 다른 이상행동은 없는 것으로 봐서, 인지장애나 치매는 아닌 것 같다.
"아버지한테 뭐 원망 살 일 한 거 있어요? 아내를 향한 아버지의 소심한 복수 같은 거 아닌가? 하하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철없는 딸의 농담에 따라 웃으면서도 어머니 표정 한 구석에는 염려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상대가 이용한 화장실의 뒤를 봐주는 사이.
평생 볼꼴 못 볼 꼴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뜨악한 모습을 보여주며 긴장하게 만드는 사이.
상대의 작은 이상에도 민감해지고 이내 근심으로 이어지는 사이.
서로의 행복한 앞날을 부탁하던 사이에서 서로의 뒷날을 부탁하는 사이.
부부.
그러니...
꼭 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