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를 떠올리니 '각설이 타령'이 자동 재생됩니다. 얼굴이 상기되고 가슴이 뛰다가 허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헛웃음을 지으며 기억에서 빠져나오려고 해 보지만 그럴수록 각설이가 제 주위를 돌며 타령을 하는 환영만 보입니다. 30년 전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해집니다. 각설이는, 저였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수원시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 학급 반장을 모두 모아 학교 연합 간부 수련회를 실시했습니다. 낯선 친구들과 생활관을 배정받아 4박 5일 동안 숙식하며 연수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나흘째 되던 수련회 마지막 밤, 학생들의 장기 자랑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각설이 분장을 하고 끈 달린 깡통까지 챙겨 무대에 올랐습니다. 긴 가사를 어떻게 외웠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신들린 듯 입에서 터져 나오는 품바 타령을 하며 무대 아래로 내려와 깡통을 들고 동냥했던 기억은 납니다. 장기 자랑이 끝날 쯤, 깡통에서는 쨍그랑 소리가 제법 났었죠.
그런 용기와 깡이 어디에서 났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접신이나 빙의라는 게 있다면 그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100%에 가까운 E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I입니다. 사람들을 만나 웃고 떠드는 자리가 싫거나 분위기를 못 맞추는 것은 아니지만, 집에 빨리 가서 혼자 쉬고 싶은 마음이 크고 약속이 취소되면 내심 기뻐하는 것을 보면 I가 설득력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수 앞에서 강의할 때, 친한 지인들과 있을 때는 E가 되어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기본값을 I로 두고 상황에 맞게 E 버튼을 누르며 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항목도 마찬가지겠지요. 때로는 감각에 의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직관적으로 상황을 인식하기도 할 겁니다. 어떤 이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T처럼 보이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순간의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F처럼 보일 테지요.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빈틈없이 일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모든 걸 내려놓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P가 되기도 할 겁니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MBTI를 선택하는 삶이 마음에 듭니다. 기왕이면 각설이 타령이 아니라 걸그룹 춤을 추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때로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조우할 수 있으니 주저 말고 스위치를 눌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