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라는 영국 국왕의 지위
지난 11월 20일 윤석열 대통령이 영국을 국빈 방문했다. 영국 왕실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이번 방문은 2013년 11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 이후 10년 만으로 특히 찰스 3세의 즉위 이후 이루어진 외국 정상에 대한 국빈 방문으로 의미가 깊다.
이에 앞서 찰스 국왕은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런던의 서남쪽에 위치한 뉴몰든(New Malden) 지역을 미리 방문하여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삶을 미리 살펴보는 예의를 갖추어 화제가 되었다. 뉴몰든은 전통 있는 윔블던 테니스 대회가 개최되는 윔블던 지역에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간 조용하고 평화로운 지역이다.
찰스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2022년 9월 8일 영면에 들어선 엘리자베스 여왕은 70년의 긴 재임 기간 동안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을까? 그녀는 아버지 조지 6세의 급작스런 서거로 1952년 2월 6일 만 25세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받았지만 이념의 대립이 바탕이 된 냉전이 전 세계로 확산된 어려운 시기에 동요하지 않고 최장수 영국 국왕이자 대영제국의 수장으로 자리를 지켰다.
국내적으로도 정당·정파 간 대립, 계층, 빈부, 세대, 인종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드러나는 사회적 갈등, 지역 간 분열 등에서 정치권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놓고 국민이 동요할 때마다 나라의 어른으로 국민을 위로하고 치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흔들림 없이 국가를 통치했다.
찰스 3세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후 74세의 늦은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았다. 간혹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왕의 세습 여론에 적신호가 있기는 했지만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오랫동안 받은 셈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재임기간 영국의 총리 15명을 포함해 14명의 미국 대통령, 10명의 프랑스 대통령, 9명의 독일 총리, 일본 총리는 32명이, 심지어 7명의 교황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 기간 대한민국 대통령도 13명이 재임하였다. 이에 못지않게 그녀는 강력했던 소련제국의 몰락도 목격했다.
그녀는 전 세계 영향력 있는 국가 지도자들과 많은 만남과 교류를 통해 세계의 지도자들 위에 존재하는 지구상의 존경받는 어른의 역할을 서거 직전까지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녀는 스탈린의 강압 통치와 공산주의라는 체제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커다란 공포와 절망에 빠뜨렸는지를 목격했다. 무려 2,00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낳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고상한 언어가 이끈 지도자의 통치행위가 중국 국민들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고난의 행군 기간 33만 여 허약한 북한 주민들이 탐욕스러운 지도자를 원망하며 굶주리며 죽어가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의식주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했다.
그녀는 또한 전후 이웃 나라 프랑스에서 드골이라는 리더가 어떻게 절망에 빠진 국민을 이끌며 위대한 프랑스를 만들어 가는지를 배웠으며, 전쟁의 책임으로 분단된 독일을 재건과 통일로 이끈 아데나워와 콜 총리의 리더십을 교훈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성실한 국민들의 노력이 어떻게 전후 일본의 부흥을 이끌었는지를 관찰했으며, 근면한 국민들이 전후 잿더미 속에서 박정희라는 지도자와 함께 베트남 정글에서, 서독의 광산에서, 중동의 사막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했는지를 목격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이 경험한 교훈을 미래의 군주가 될 아들 찰스에게 자연스럽게 물려주었고, 이제 국왕이 된 찰스 3세는 귀중한 유무형의 자산을 계승한 왕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 찰스 3세보다 가치 있는 자산을 가진 군주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더해 지금도 까다롭고 특별한 절차를 거쳐서 소수의 인원으로 선발된 영국의 최고 엘리트들은 왕의 거처이자 왕실의 거주지인 버킹검 궁(Buckingham Palace)에서 왕을 위해 봉사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헌신하고 있다.
그들은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를 충실히 전달하고 국왕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중지를 모은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의 상징적 수장인 왕에게 현명한 판단과 적합한 상황인식을 갖도록 국내외 이슈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균형 잡힌 책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충실한 참모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지금 찰스 3세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바뀔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정치학자들은 군주제 국가에서는 왕실은 단순히 상징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총리의 역할과 구분해서 설명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 벨기에, 그리고 일본처럼 군주제가 존재하는 국가들에서 왕실이 국민들로부터 받는 존경과 애정은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중에 영국은 가장 대표적이랄 수 있다. 정치학자들의 안목이 정치이론을 넘어서서 역사의 흐름과 통찰을 가지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역사와 정치를 통찰하는 안목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있을까. 작금의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기대를 접는 것이 현명할 듯하다. 무능과 부패가 그들을 상징하는 언어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국가의 이익보다 자신들만의 집단이익을 탐하며 국민을 절망하게 만드는 그들에게 이미 민심이 떠난 지를 그들만 모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영국 방문 기간 찰스 3세를 만나 많은 걸 느끼고 왔을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찰스 국왕이 어머니 엘리자베스 여왕 곁에서 묵묵히 배웠던 지도자로서의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는 시간도 가졌을 것이다. 그런 인연의 가교를 놓고 귀국한 것도 큰 성과다. 앞으로 윤 대통령이 보고 느끼고 온 것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더 위대한 발전을 위해 지혜와 책략을 갖춘 지도력을 펼치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