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기간은 물론 전후에도 국가지도자로 프랑스를 이끌었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1.22~1970.11.9)은 프랑스 역사에서 나폴레옹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드골은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가이자 군 장교, 정치인으로 성장하면서 임시정부 주석, 총리를 거치며 마침내 1959년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프랑스 제5공화국을 수립하는 등 현대 프랑스 정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지만 드골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비판은 ‘권위주의적 지도자’, ‘민주주의를 경시한 인물’, ‘공화국의 이름을 빌린 보나파르트주의자’ 등 다양한 관점에서 분출된다. 특히 1968년 5월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대규모 봉기에서는 그를 두고 ‘시대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노인 권력자’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압도적인 것은 지도자로서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뚜렷한 신념과 확고한 철학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드골은 ‘자유 프랑스의 상징’, ‘위대한 프랑스를 재건한 지도자’, 로 평가받으며 현대 국가체제를 설계하고 수호한 인물로 프랑스 국민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도록 한 인물이기도 하다. 시민들은 오늘날까지 ‘프랑스를 위대한 나라로 인식하게 만든 마지막 인물’이라는 찬사로 그의 통치시기에 대해 기억한다.
드골의 10년 연하인 아내 이본 드골(Yvonne de Gaulle)은 종종 “드골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골은 국익을 논하는 자리에서 단 한순간도 인간적인 사랑스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익은 철저히 감성이나 감정이 아닌 이성적 논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후 냉전기간 수많은 협상 테이블에서 그를 상대했던 서구 동맹의 핵심 인물이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나 처칠, 이든, 맥밀란 같은 영국 총리들의 드골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다. 처칠은 드골의 용기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고집과 불신을 비판했으며, 이든은 드골을 ‘협상 불가능한 민족주의자’로, 맥밀런도 드골이 스스로를 ‘프랑스 국가 자존심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케네디도 드골은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는 인물’이라며 비판에 가세했다.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드골은 자기 인식에 철저한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이 1·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경험했으며, 1940년 나치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조국 프랑스의 사실상 붕괴와 그 후 영국으로 망명, 그리고 전후 프랑스의 재건을 위해 진력을 다한 경험을 통해 “국가는 위기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했던 인물이었다.
드골에게 프랑스는 단순한 승전국이 아니라 문명적 중심국이었다.
그는 스스로 ‘프랑스는 왜 다시 대국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미국·소련·영국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제3의 전략축을 지향했다. 드골의 이런 생각은 전후 서방세계가 공산주의 세력과 이념갈등이 고조되면서 곳곳에서 갈등과 충돌이 지속되는 배경 속에서도 확고한 통치철학으로 존재했으며, 드골 자신은 물론 그의 정치적 후계자들에게 프랑스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자리 잡으며 오랜 기간 지속됐다.
드골은 이런 신념으로 2차 대전 패전 이후 국가적 굴욕을 겪던 프랑스를 국가 주권 회복, 위상의 재정립, 그리고 역사적 연속성의 상징으로 다시 정의했다. 그는 국가지도자로 국민들에게 독일에 맹종하던 비시 정부와 달리 “프랑스는 패배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하기도 했다. 드골은 국가 존립에 독립, 주권, 전략적 자율성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상의 가치로 인식했고, 집권 기간 내내 일관성을 가지고 이 가치의 보존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2024년 3월 22일 우리 지도자가 이웃 국가를 상대함에 있어 무조건 “쎄쎄(謝謝)”하면 된다고 발언하는 걸 보면서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드러난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이 발언을 하면서 손을 아부하듯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몸짓까지 보여 비판을 자초했다. 그에게 지도자로서 국가 주권과 위상, 그리고 이 못지 않게 국민의 자긍심과 명예를 존중했어야 한다는 요구는 무리한 것일까. 그에게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가'에 대한 드골만큼의 뚜렷한 신념과 확고한 철학이 과연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현상이지만 중국인들이 점점 우리를 얕보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래전 타국에서 유학하던 청년시절에 경험했던 중국 젊은이들의 우리에 대한 기억과는 뒤집힌 현실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축구에서 주장의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소하지 않다. 손홍민이 영국 EPL의 토트넘 축구팀과 우리 국가 대표 팀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주장은 팀을 대표하고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이끄는 중요한 핵심이자 상대방 선수들이 적진의 전력을 평가하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된다. (우리에게 손홍민이라는 주장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모른다).
중국인들은 왜 우리를 얕보기 시작했을까?
몇 해 전 중국을 국빈 방문해서 수차례 ‘혼밥’을 먹는 우리의 엉성한 지도자 이미지가 14억 중국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본 중국인들이 ‘한국은 여전히 보잘것없는 우리의 속국이구나.’라는 역사적 기억을 꺼낸 게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경제발전도 한몫했을 것이다).
21세기 우리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우방’과 ‘동맹’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한 오직 ‘국가 이익’만을 눈앞에 둔 약육강식의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 냉전의 시대에 세계는 또다시 국익추구의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역사가 주는 교훈 중에서 불변의 진리가 있다.
그것은 중요한 시기에 올바른 지도자가 나타난 나라를 제대로 이끌었을 때는 반드시 성장한다는 것이며, 반대로 막중한 시기에 어설픈 지도자가 나타나 우왕좌왕하며 나라를 이끄는 경우에 그 나라는 반드시 쇠퇴하고 추락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과연 어떤 철학과 신념으로 무장한 인물이어야 할까? 이 나라의 지도자는 과연 그런 능력을 갖춘 인물인가.
우리 앞에 전개될 미래의 역사가 그 답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