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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Oct 07. 2021

그들이 동거하는 이유

  



우리나라에서 결혼하지 않고 ‘동거(Cohabitation)’하는 젊은이들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는 새삼스러운 뉴스가 아닌 게 되었다. 하긴 기회만 되면 집을 뛰쳐나가려는 의식이 가득한 젊은이들이니 많은 만큼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처음 영국에 가서 동거하는 젊은 커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문화적 충격 탓이었다. 


‘왜 저들은 결혼하지 않고 동거를 할까.’

나중에 동거의 배경이 그렇게 간단한 것인 걸 듣고 더 놀랬다.


유럽에서 18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판단하고 개척해야 하는 나이가 된다.

“아시아에서 온 20살과 유럽의 20살 사이에 그렇게 차이가 있는 줄 몰랐다”라고 영국인 교수에게 들은 적이 있다. 동양 학생들을 보고 한 말인데 성인의 나이가 돼서도 자신의 장래문제를 늘 부모와 상의하고, 경제적으로 부모에 의지하며, 심지어 결혼 이후에도 부모로부터의 지원이 계속되는 경우를 듣고 놀라며 한 말이다.  


   



내 지도교수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분인데 그분의 아내는 의사로 영국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의 생활과 판단을 할 수 있는 분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장녀인 딸 하나와 그 밑으로 아들 둘이 있었는데 부부는 큰딸이 대학에 입학해서 집을 떠나 독립적으로 사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종종 말했다. 다 큰 아이가 집에서 같이 있는 게 마뜩지 않다고 했다.  


    



영국 사회는 성인이 된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압박을 가한다. 영국 대학에서 학생들은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하므로 대학생이 되면 자연스럽게 가정을 떠나 독립적인 삶을 시작한다. 애초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는 젊은이들은 성인이 되는 나이 무렵이면 집을 나와 직장을 다니거나 가게 등지에서 일하며 스스로 살아간다.     


 



유학 초기에 영어 학교에 다니며 일반 주택에 방을 빌려 살 적의 이야기다. 아일랜드에서 온 20살 청년과 그 또래 영국인 여성, 그리고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이 인도 출신의 집주인 밑에서 각자 방을 얻어 살았다. 이미 성년이 된 그들은 고향과 집을 떠나 아일리시는 건축공사장을 거쳐 푸줏간에서, 또래 영국 아가씨는 주중에는 빵가게에서, 주말에는 생선가게에서 일하며 제각기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주급 노동자인데 영국은 직업과 직종에 따라 각각 일당, 주급과 월급을 받는다.


      



월급쟁이는 대개 연봉으로 계약하는데 화이트 컬러의 중산층이고 주급과 일당을 받는 사람들은 중산층 이하가 대부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눈이 맞은 아일리시와 잉글리시가 동거를 시작하며 조금 큰방으로 옮겨 살기 시작했다. 드디어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단지 애정행각의 결실 정도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들과 이야기하며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우리가 상상하듯이 남녀 간 애정의 결합만이 아닌 다른 이유가 복합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부모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집을 나와 스스로 살아가려면 가장 큰 고민이 경제적으로 독립이 가능한가의 문제다. 세상 노동자들이 겪어야 하는 애잔한 현실의 출발점이다. 그들이 일을 하고 주급으로 약 500파운드쯤을 받으면 그중에 20-30%가 집세(single room)로 나간다. 30%가량은 식품 구입과 식사 등 비용으로, 30%는 교통과 통신비, 나머지는 용돈이다. 10-20%가 기껏 쓸 수 있는 용돈이 된다.  


    



젊은이들이니 만큼 가끔씩은 자신이 응원하는 축구팀의 경기장에도 가야 하고 공연장이나 나이트클럽도 들러야 한다. 종종 펍(pub)에서 술도 마시고 게다가 젊은 나이니만큼 이성친구와 교제도 해야 한다. 돈이 없다고 건강한 남녀가 혼자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주머니 사정은 늘 빠듯하다.    


  



집을 나와 외롭게 살지만 이성을 만나게 되고 관계가 깊어지면 경제적 돌파구를 찾는 방안이 고려되는데 이들에게 동거가 유용한 방안이 된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조금 큰 방(double room)을 구해 같이 살면 방세와 생활비에서 적지 않은 돈이 절약된다. 더 나은 음식도 먹을 수 있고 펍에서 맥주 한두 잔을 더 마실 수 있으며 주말에 영화관에 갈 비용이 생긴다. 같은 집에 살고 있으니 이성 친구를 보러 가기 위한 교통비도 절약되고 전화통 앞에 서서 꾸준히 동전을 넣지 않아도 된다.     


 



애초에 동양의 성윤리나 남녀 간 유별에 대한 공부는 해본 적이 없는 그들이니 결정도 자유롭다. 그런데 그들은 대충 사는 걸까?     





나이 든 서양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편안해 보인다. 얼굴에 미소도 가득하다. 노후에 신경 써야 할 경제적인 문제의 상당 부분이 정부 책임으로 넘어간 것도 편안함의 배경이 될 것이다. 연금은 말할 것도 없고 병원비가 무료인 데다가 노후까지 정부가 굶어 죽지 않도록 정책적으로 배려를 하니 말이다. 게다가 성인이 된 자식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손주들을 힘들게 양육해야 하는 문제는 꿈속에서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얼굴이 편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늦둥이 자녀가 생겨 노후에 대학 등록금이 신경 쓰이면 그것도 제도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동양에서는 유교가 개입하여 가족관계를 묶어버렸다. 군주와 부모,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기준을 마련해 놓았으니 오죽하겠나. 서양 사람들은 집단이나 국가보다 내가 우선이다. 우리에겐 흔한 '우리나라(Our country)'라는 표현을 그들이 얼마나 낯설어하는지 보라. ‘우리 집사람(our wife)’ 혹은 ‘우리 남편(our husband)’이라는 표현을 쓰는 간 큰 사람은 없다.  

    




그들에게는 국가나 사회, 회사 등 모든 것에 앞서 내가 우선이다. 부부로 살다가도 마음에 벽이 생기면 헤어지고 더 편한 상대를 만난다. 내가 편한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니 얼굴이 편안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 백모는 평생 ‘김 씨 집’에 시집온 것을 원망하다 돌아가셨다. 그는 김 씨 집안을 원수의 집안처럼 생각했다. 우리 김 씨 집과 백모의 집은 로미오와 줄리엣 집안처럼 원한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그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으며 나는 늘 궁금해했다. 

‘큰 어머니가 이 씨나 박 씨 집으로 시집갔으면 과연 잘 사셨을까?’

‘왜 일찍 이혼해서 편하게 살지 않으셨을까?’

백모에게는 유교의 가르침이, 또 자식들이 웬수였을 거다.   


  



우리의 이런 현실과 비교해 볼 때 이혼한 부부가 비록 다양한 이유로 이혼을 했지만 서로 오가며 또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식들과도 편하게 지내는 영국 사람들이 근본조차 모르는 몰상식한 사람들은 아닌 듯싶다.      

우리는 여전히 ‘웬수’ 동거하는 부부가 많다. 어느새 황혼 이혼이 로망이 되었다. 인생의 긴 여행길에 웬수 만나기 전에, 또 어려움을 공유하며 더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기회를 모색해 본다는 점에서 영국 젊은이들의 동거가 긍정적인 면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친한 친구가 객지에서 혼자 살고 있는 아이의 결혼 전 동거 문제로 상의를 해왔다. 이런 설명을 하며 ‘요즘 젊은이들은 현명하니까 지들이 알아서 살도록 놔두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답을 했다.

친구가 물었다.


“너 같으면 어쩌겠냐?”     

술잔을 들이키며 곰곰 생각해 봤다.

그런데 성숙 의지를 갖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힘든 날갯짓으로 무장한 청춘들이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될까. 공연히 자기들 즐기고 싶은 삶을 위해 필요만을 선택하는 약은 지혜만 남은 것은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동거를 해보며 습관이나 취미, 인성 등을 미리 파악해 보지 않고 무작정 결혼을 한 게 은근히 억울해진다. 이 글이 드러나면 한바탕 곤욕을 치르겠지만 세상 남자들의 속내를 ‘온전히’ 대변한 거니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해도 많은 남자들로부터 위로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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