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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Oct 07. 2021

No Sex Please, We're British

2. No sex please, We're British




글의 제목은 1971년 6월 런던의 공연장이 밀집한 웨스트엔드(West End)에서 무대에 올라 1987년까지 장장 16년간 총 6,761회 공연되었던 연극의 이름이다. 클리프 오웬(Cliff Owen)이 연출을 하고 앨리스터 푸트(Alistair Foot)와 연출가이자 배우인 앤소니 메리어트(Anthony Marriott)가 각본을 썼다. 무대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도 장기 공연을 했으며 연극의 흥행을 바탕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연극은 섹스에 대한 본성과 위선을 결합시킨 풍자극으로 복잡하게 얽히는 사건들을 통해 넘치는 웃음을 선사하며 점잖은 척하는 영국인들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비록 오랜 기간 유럽연합의 회원국으로 활동했지만 영국인들은 ‘영국인답다’ 거나 혹은 ‘영국인스러움’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 눈에야 프랑스인이나 독일인, 그리고 이태리와 스페인 사람들이 영국인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이해한다.





영국인들을 다른 민족과 손쉽게 구분하는 특징은 언어나 영토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문화를 통해 축적된 눈에 드러나지 않는 가치와 전통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영국인임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영국의 밤은 지루하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길거리는 순식간에 한산해진다. 지방도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세계적인 대도시 런던의 풍경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런던 시내 중심가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 역 근처의 차이나타운이 있는 Soho지역은 다소 예외적인데 주변에 많은 술집과 공연장, 극장들이 몰려 있어 조금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드문 경우라고나 할까.     


반면에 남부 유럽의 이태리나 스페인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중부 유럽의 네덜란드나 프랑스, 독일의 도시도 영국에 비해 활기차다.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인 네덜란드만 해도 수도 암스테르담 광장 앞에 운하를 끼고 늘어선 소위 홍등가는 많은 관광객들로 밤늦도록 어수선하며 헤겔의 모국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역 주변도 인종별, 대륙별로 특색을 달리하는 홍등가가 있어 소문을 듣고 구경 온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밤을 밝힌다. 북유럽의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덴마크도 은밀한 밤 문화가 존재한다.      


이에 비해 런던의 밤은 일찍 해가 저문다. 거리는 고요하고, 사람들은 대개 집안에서 밤 시간을 보낸다. 영국 TV 프로그램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호색스럽지(?) 않고 점잖은 내용들을 방영한다.





그렇다고 청교도 사상의 모국이었던 영국인들이 늘 근엄하고 도덕을 중시하며 일상에서 점잖고 신사 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벌써 왕의 자리에 앉아도 좋을법한 올해 72세인 찰스 왕세자도 국민들의 사랑을 받던 아름다운 다이애너 비를 제쳐두고 젊은 시절부터 사귀어 오던 이혼녀 카밀라 파커 볼스와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류 왕자도 비슷한 일로 이혼했다.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왕실의 중요 인물들이 그 정도니 평범한 시민들의 삶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신보다 24세가 연하인 여자 친구와 최근에 결혼식을 올린 보리스 존슨 총리는 해외의 국가 지도자 중에 염문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에서 친구나 주변에 여성을 소개할 때 흔히 이런 표현으로 구분하곤 한다.

“She is my girlfriend” (나와 동거 동락하는 애인이라는 뜻이다. 가끔 girlfriend 대신에 partner라고도 말하는데, 이때는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한다).

“She is my friend” (같이 술도 마시고 공원에도 놀러 가고 식사도 종종 하지만 나이 불문의 단지 여자 친구라는 뜻이다).

여성이 남자를 주변에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상을 그렇게 구분하고 또 그런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이웃 국가 프랑스는 이런 영국인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자신들처럼 분명하지도 않고 도대체 저 관계가 뭐냐는 의심을 늘 갖게 만드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국인들을 척박한 토양에서 먹는 음식이라고는 ‘fish & chips’ 밖에 모르는, ‘먹는다’는 거룩한 행위에 대해 예의를 갖출 줄 모르는 야만스런 민족쯤으로 생각한다. 둘러싼 환경처럼 ‘음습하고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고립된 섬에 살고 있는 음흉한 인간들’ 정도로 그들을 대한다.      


영국 사람들이 프랑스인을 보는 관점도 그리 고상하지 않다. 늘 바쁜척하고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며 말이 너무 많아 머릿속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입으로 내뱉는 성마른 인종으로 그들을 본다. 게다가 문명을 대하는 습관도 정신이 없을 정도여서 갑자기 혁명을 일으켜 인접 국가들을 놀라게 하거나,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해괴한 논리를 놓고 현실에서 답을 찾으려 온갖 궁리를 하는 민족쯤으로 이해한다.





영국인들 중에는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차키를 맡겨선 안 된다고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프랑스인들의 운전습관은 인접 국가인 이태리 사람들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난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국에서는 식민지 출신의 시민들이 그런 무질서한 습관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전형적인 영국 신사와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차를 마시는 자리임에도 영국식 조끼를 입은 슈트에 넥타이를 매고 모자까지 쓰고 나왔다. 말은 부드럽고 천천히, 그리고 사려 깊은 태도에 종종 고상한 유머를 섞어가며 영국의 일상을 가벼운 주제를 선택해서 대화를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프랑스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가 달라졌다. 평소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얘기해야 하는데 마음이 그렇지 못하니 표정과 표현의 불일치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점잖은 신사가 긴 얘기를 마무리하며 내린 결론은 이랬다.     


“프랑스라는 나라는 저런 인종들이 살기에는 땅이 너무 아까워.”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다는 영국의 척박한 땅, 그마저도 늘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며 농사라고는 감자 이외에는 특별히 기대할 게 없는 척박한 토양에 사는 영국인들 눈에 늘 질서 없이 어수선하게 사는 프랑스인들이 광활하고 비옥한 논과 밭, 게다가 그곳에서 아름다운 꽃들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까지 생산이 되는 현실은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영국 사회 안에는 분명한 이중 잣대가 존재한다. 그것은 지구 인구와 영토의 1/4을 식민지로 경영하며 가졌던 ‘신이 부여한 역사적 책무’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이 결합해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잣대중 하나가 왕실과 이혼녀이자 유색인종 출신인 해리 왕세손의 부인 메건 마클과의 갈등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이유로 프랑스 전 대통령이었던 프랑소와 미테랑의 스캔들이 언론에 보도되고 숨겨두었던 딸이 공론화되는가 하면 마크롱 현 대통령이 재학 중 선생이었던 여인의 이혼 사유를 제공하고도 결합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과 달리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스캔들을 영국 국가정보기관까지 동원해서 막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살면서 관찰해 보니 영국인들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점잖고 과묵을 덕목으로 여기며 과거에 집착하는 보수적 성향의 국민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른 국가들과의 상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일부 공감을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들은 진취적이고 역동적이며, 창의적이고 가치를 생산하는 성향의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이중적 성향이 있는 실용적인 국민이다. 세계를 정복하던 그들의 진취적인 성향은 제국을 이루지 않았던가.      

그들이 얼마나 역동적인지 영국 축구경기에 열광하는 관중들을 보라. 문학, 의회제도, 사법체계, 기술과 산업 발전은 물론 영화와 연극, 뮤지컬 등 문화 분야에서 나타나는 영국인들의 창의적 발상을 상상해 보시라.





생산적인 사고의 결과 1997년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에 의해 만들어졌고 1차, 2차, 3차 산업에 이어 오늘의 영국을 이끌어 가는 중요 산업이 된 창조경제의 사례를 보라. 창조경제의 아이디어는 일본과 한국에서 시간을 두고 가져갔다. 그들은 열악한 자연환경과 결코 우월하지 않은 여건 속에서 늘 상상하고 고민하고 실행한다.      





지난 4월 11일 영국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에서 열린 2021년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의 수상소감이 어록이 되었다. ‘고상한 척하는 영국인들(snobbish British people)’이 자신을 명배우로 인정해 줘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시상식의 진행을 맞은 유명 배우 데이비드 오 옐러 워가 폭소를 터뜨릴 지경이었으니 적당한 장소에서 정확한 표현을 적절하게 한 것이다. 짐작컨대 보도를 통해 윤여정의 소감을 들은 프랑스인들은 정말 통쾌해했을 것이다.   



  



영국이 1973년에 가입한 이래 유지해오던 유럽연합의 회원국 지위를 스스로 버리고 다시 고립된 섬이 되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어도 같이 하면 먼 길을 갈 수 있다(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는 말이 있는데 영국은 독자적인 판단으로 힘든 길을 선택했다.



 


안전하고 편안한 길을 가는 인간의 본능, 본성을 버리고 또 다른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영국인의 항해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99세의 나이에 영면에 들어간 나라의 어른 필립공의 죽음을 맞아 영국인들은 좌절을 딛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될 것이다.     


‘좋아! 우리 다시 시대를 개척해 보자고!’    

 




우리의 눈에 영국인들의 밤은 앞으로도 지루할 것이다. 그들도 자신들의 밤을 무료해할까? 혹시 이렇게 조용히 외치지 않을까?


‘No sex please, We’re British.‘


그들은 또 그들의 길을 갈 것이다.    


 



우리와는 5,500마일가량 떨어진 녹녹지 않은 자연환경과 척박한 주변 여건도 비슷한 ‘중강국’ 영국의 현재 모습을 보며 우리를 되돌아본다.

우리도 우리 다움으로 무장해야 하지 않을까.




사진 출처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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