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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Nov 01. 2021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박정희 시대에 대표적인 공안사건으로 민청학련 사건이 있다면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진보당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위협할만한 인물로 조봉암이 부상하자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국가변란을 주장하며 진보당 사건을 조작한다. 정부와 사법부가 결탁한 용공조작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관련 인물 중 당수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많은 의식 있는 정치인들과 진보당의 정책을 지지하던 젊은이들이 옥고를 치르고 집안이 몰락했다. 2011년 대법원은 사건을 다시 규명하여 처형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관련자들에 대해서도 권리의 회복을 결정했다.



사건에 연루되어 장기수로 복역 중 폐결핵을 얻어 생사의 기로에 처해있던 친구의 부친은 정부의 출소 결정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차가운 감옥에서 나와 한동안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 


결국 죽을 목숨이니 가족들과 마지막 순간을 보내라는 배려로 포장되었지만 자신들의 책임을 면하려는 얄팍한 정부의 결정을 힘없는 친구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감옥에 계실 때나 집에 돌아와 병으로 누워계실 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친구의 어머니는 모진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귀하게 자라 고운 외모와 성품을 갖고 계시던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 셋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고 몸이 망가지도록 일을 했다. 


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좋고 외모도 출중했던 장남인 친구의 형은 일찍이 대학을 포기하고 사관학교에 가기로 작정했다. 당시 서울에서 군 장성 출신이 설립한 S고등학교는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사관학교로 진학시키는 명문 고등학교였다. 


이 학교에 재학하던 형은 성적도 우수하고 심신도 강건해서 선생님들 모두가 훌륭한 군인이 될 거라며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형은 사관학교 입학에 실패했다. 결과를 놓고 모두들 의아해했다. 


결국 대학을 선택한 형은 장학생으로 선발될 만큼 공부를 잘했고 어머니의 고생과 동생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그리고 학비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해 ROTC에 지원했다. 최종 결과는 또 낙방이었다. 


형이 한 해 공부하고 한 해 휴학하며 일하는 모습을 본 친구는 아예 대학 진학을 포기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시험에 합격한 친구를 우리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부임할 지역을 통보받고 친구는 당혹스러웠다. 

서울에서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강원도 횡성군 **면 농수산통계사무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친구는 작은 옷가방 하나를 메고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횡성 가는 버스를 탔다. 


거기서 친구가 맡게 된 일은 각종 농산물 재배 관리업무. 

봄과 여름에는 농가를 방문해서 농산물 재배현황을 파악해서 통계를 냈다. 또 수확할 무렵에는 논밭으로 나가 넓이를 어림짐작해서 장부에 기입해 온 이후 그것을 면단위로 통계를 종합하여 군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군에서는 도에 보고할 것이고, 도에서는 서울에 있는 장관에게 보고가 될 것이며, 그 후에는 장관이 대통령에게 “올해 농사는 사상 최고의 풍년”이라고 보고한 후 칭찬을 받으면 되는 일의 최 말단 업무였다. 


자전거 오토바이는 그때 등장한 신문물이었다.

자전거에 어설픈 엔진을 달아 힘들이지 않고 이동을 하게 해주는 편리함으로 논길을 다녀야 하는 농부들이 즐겨 애용했다. 고장이 날까 봐 아이들 통학에도 내주지 않을 만큼 농가에선 귀한 대접을 받았다.

 

자전거에 엔진을 장착하는 것이 불법이었지만 넓은 지역을 살피기 위해 다녀야 하는 친구와 동료들도 기구의 편리함으로 이것을 자주 애용했다. 


어느 날 친구는 동료와 이웃한 지역을 살피기 위해 같이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시골길 대부분이 흙과 돌이 섞인 길이었던 당시 뒤에 앉아있던 친구는 흔들리는 자전거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를 조이다가 체인에 발뒤꿈치가 빨려 들어갔고 큰 부상을 입었다.


친구는 오랜 시간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한여름 내내 고통 속에 병원에 누워있는 것만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그해 여름은 마른장마가 계속되면서 지독하게 무더웠다. 


병원에는 병실마다 달랑 선풍기 하나가 있는 것이 고작이어서 환자들과 면회 온 가족들이 동시에 모여 있는 시간대에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바깥이나 병실 안은 큰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마다 한 손에 부채를 들고 있었지만 이 사람 저 사람 흔들어대는 손 움직임에 몸에서 나는 땀으로 실내는 더 후끈거렸다.


친구는 입원하고 긴 시간을 보낸 터여서 병실 안에서는 제법 위세를 떨 고참 환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큰 부상으로 반 불구 상태여서 큰소리를 낼 처지도 못되었다. 


초봄에 병원에 들어와 긴 여름이 지나면 두 다리로 서 있게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던 터였다. 의사는 몇 차례에 걸친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그는 목발을 짚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불구가 되었다. 


그나마 한쪽 다리가 멀쩡한 게 다행스러웠지만 한쪽이 불구가 된 상태에서 다른 한쪽 다리가 멀쩡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기간 내내 친구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운명이 이런 처지가 되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김일병!  정문 면회!”


행정과의 이상병이 내무반으로 직접 찾아와 청소를 하고 있던 나에게 면회신청이 들어와 있다고 전해왔다. 일과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누가 평일 저녁때 면회를 왔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부모님은 아닌 게 분명하고 올 사람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보고를 하고 내무반을 나섰다. 내가 있던 참모부 내무반은 정문과는 끝과 끝 거리에 있었고 내무반에서 면회실까지는 연병장을 지나 100미터가 넘는 운동장을 걸어가야 했다. 


때는 늦가을. 오후 7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인데도 지는 해의 노을과 잔잔한 어둠이 서로 힘겨루기라도 하듯 애매한 어둠이 노을의 잔영을 힘겹게 밀어내며 깔리기 시작했다. 


석양이 지는 늦가을은 그리운 것이 많아 늘 서러웠다.

그리고 그리움은 그리움을 표현하지 못하는 현실로 인해 마음 짠하게 더 그리웠다.


빠른 걸음으로 면회소 부근으로 다가가자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친구였다.

한 손으로는 목발을 짚고 또 다른 한 손엔 묵직한 봉투를 든 채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여긴 어떻게 왔어?”

“집에 가는 길에 들렀지.”


연거푼 질문에 그가 순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에게 문병을 다녀온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그가 다쳤다는 연락을 듣고 주말에 외박을 신청해서 횡성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게 언제쯤이었던가?’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친구도 나도 잊어버리고 싶은 뜨거운 여름이었던 탓일까. 


나는 귀대를 했고 졸병답게 매일매일 땀을 흘리며 더운 여름을 부지런히 보내고 있었다. 그와는 편지로 안부를 묻곤 했었다. 


양평에서 횡성까지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외출을 해서 양평을 벗어나 강원도로 들어가면 위수지 이탈이 되는 바람에 횡성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면회실 식탁에 앉자마자 그가 봉투를 열었다. 


“저녁 먹었니? 저녁 먹기 전에 온다는 게 몸이 이래 이제야 왔구나. 너무 늦었지? 


그래도 이거 더 먹어라. 군인은 늘 배가 고프다던데.”


봉투 안에는 튀긴 통닭이 한 마리 들어 있었다.


“에이, 다 식었네. 통닭은 따뜻해야 고소하고 맛있는데.”


그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걸 어디서부터 가져온 거야?”


“응. 횡성에서 들고 오면 다 식을 거 같아서 양평 시내에 내려서 구했지. 근데 버스 내려서 걸어오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서 이렇게 돼 버렸네.”


“아니 그 몸으로 왜 고생을 했어. 그냥 오지.”


내가 근무하던 부대는 옥천냉면으로 유명한 지역의 입구에 있었다.

양평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는 군부대 면회객들에 대한 배려로 큰길에서 한번 정차한다. 


국도의 대로 큰길에서 부대까지는 평범한 군인에게는 빠른 걸음으로 15분 거리다.

평범한 사람들은 20분쯤 걸리는 거리라고들 했다. 


친구는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목발을 짚고 힘든 걸음을 했다.

한 손엔 통닭이 든 봉투를 꼭 붙들고 있었으니 족히 한 시간 이상의 걸음을 했을 것이다. 


“오늘 퇴직하고 집에 가는 길이야. 그 김에 너를 보고 가려고 이렇게 온 거구.”





“규정을 어기고 부상까지 입었으니 제가 책임을 져야지요.”


그는 이 말을 끝으로 일터를 떠났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헌신적으로 일하고 싶었던 첫 직장이었다.  


“그러게 왜 말을 듣지 않고 그런 걸 타고 다니며 사고를 냈어? ”


아버지 연령의 마음씨 착한 시골 어른이었던 소장은 그를 위로했고, 가족 같던 동료들도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다.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조금 넣었으니 치료받을 때 쓰도록 해. 다 잊고 돌아가 잘 회복하길 바라네.”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을 하던 동료들을 뒤로하고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우울한 얼굴로 식어버린 통닭을 먹었다. 


나는 군인이었지만 씩씩하지 못했고, 그는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지만 자유롭지 못했다.


저녁노을이 사라지고 어둠이 짙게 깔렸던 늦가을 저녁, 양손에 목발을 짚고 컴컴한 논길을 힘들게 돌아가던 친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스무 살 군인이었던 나는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아이들에게 당당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희망.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었던 아들의 소망. 

그들의 꿈은 어디로 갔을까.




ps : 착한 친구는 여전히 치료를 계속한다. 다행스럽게도 목발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늦게야 마음씨 고운 여인을 만나 결혼했고 예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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