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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Nov 11. 2021

친구의 약속


“너는 가서 아무 걱정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 돌아와라. 

내가 부모님께 아들 노릇하고 있을 테니.”


또래 중에 의리가 있고 배짱도 좋은, 어릴 적에 늘 붙어 다니던 친구가 오래전 멀리 떠나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우리는 늘 같이 어울렸다.

공부 빼고는 다 우등생이었다.


어느 날, 친구는 우리보다 키가 작았던 수학선생에게 한 시간 동안을 얻어맞았다. 

그저 선생이 들어왔는데도 큰 소리로 떠들었다는 죄로. 


떠들고 있었으니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걸 몰랐다는 친구의 변명으로 괘씸죄가 추가되었다. 몇 차례 볼을 맞고도 꿈쩍도 하지 않는 학생을 보며 선생은 악이 바쳤다. 


그는 손바닥으로, 주먹으로, 발로, 마침내 몽둥이로 한 시간 내내 얻어맞았다. 

선생은 “잘못했다”라고 사죄를 구하라 했고, 친구는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는 울분을 느끼며 한 시간 동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마침내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 친구는 “개**” 소리를 선생의 면전에 내뱉고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대학을 가고 싶지 않았던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원을 해서 군대를 갔고 제대를 한 후에 다행스럽게 직장에 취직했다. 


친구는 미국계 다국적 제조회사에 공원으로 취직을 했고 어릴 적의 성격대로 “힘없는 노동자들의 부당한 처우를 개선하라”는 목소리를 높이며 노동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노조 결성이 불법이던 시절이었던 까닭에 그는 자연스럽게 불법노조를 이끌던 반산업화 세력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당시에는 분신자살이 유행했다. 대학의 캠퍼스에서도, 산업현장에서도 민주화를 외치던 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지금도 그 시대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낯익은 이름들이 있다. 


친구의 공장에서도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고 친구는 “여공의 분신을 사주했다”는 죄목으로 검거대상이 되었다. 그는 몸을 피했다. 그리곤 수배자 신분으로 경찰을 피해 광산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그 소식을 멀리 유럽에서 한 달이 지난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강원도 곳곳에 산재해 있던 광산이 그나마 먹을 것을 해결하며 몸을 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당시 비슷한 처지의 젊은이들이 광산 곳곳에 숨어들었던 까닭에 경찰이 불시에 들이닥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친구는 어촌으로 숨어들었다. 여권이 없으니 원양어선을 탈 수 없었으므로 어촌 근해를 다니는 작은 고깃배를 타며 시절을 기다렸다. 


그 무렵 부모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친구가 설을 앞두고 귤 한 상자 들고 큰절하고 갔다고.


어머니는 추운 겨울에 친구가 장갑도 없이 손이 검어서 왔다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친구는 수배 중이었고, 아들 노릇을 위해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서울에 들어왔던 것이다. 곳곳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오래되지 않아 친구는 경찰서로 걸어 들어갔고 경찰은 수배 중이던 자를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참 어려운 시절이었다. 


지금도 수학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우리는 가끔씩 구의동 먹자골목의 마약 닭발 가게에서 만난다. 


숯불에 구운 닭발의 맛도 제법이지만 우리를 볼 때마다 매혹적인 큰 눈을 흘기며 반갑게 맞아주는 마음 따뜻한 여주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절은 왜 지금도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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